박근혜 대통령은 올해 사상 초유의 '비선실세 국정농단' 파문에 휩싸인 뒤 탄핵심판대에 올랐다.<사진제공=뉴시스>

[여성소비자신문 김영 기자]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100만 촛불민심에 정치권이 화답했다’는 게 일반적인 국민들의 인식이다. 일부에선 “탄핵안 가결이 끝이 아니다”면서도 “민주주의의 승리이자 시민이 승리한 날”이라고 이날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날은 한국 여성정치사 나아가 한국사에 있어 결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날이기도 했다.

문민정부 출범 후 최다 득표수·득표율을 기록하며, 헌정 사상 최초 여성대통령이자 첫 부녀 대통령에 취임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 1년여를 넘게 남겨둔 시점에서 4%라는 역대 최저 수준의 국정운영지지율을 손에 받아든 채 탄핵심판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 가결에 대해선 ‘적절했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단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 국가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른 여성리더가 봉건시대에나 있을 법한 국정문란·국기문란 사태를 유발하고 명예롭지 못하게 물러나게 될 처지에 놓였다는 것에 박 대통령 개인에 대한 동정보다 사안 자체에 대한 안타까움이 큰 모습이다.

박 대통령의 정치적 몰락에 대해 외신 역시 그보다 앞서 탄핵된 호세프 브라질 전 대통령, 미국 대선에 출마했다가 도널드 트럼프에게 패한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과 함께 ‘글로벌 여성정치의 실패’ 사례로 꼽고 있다. 미국 경제주간지 포츈에서는 “박근혜 대통령 사태로 한국 정치에서 여성들이 주권을 잡기가 더욱 어려워졌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포츈은 “여성의 높은 사회적 지위를 불편해하는 이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자질보다 그녀가 여성이었다는 점을 이용해 여성을 공격할 수 있다”고도 전하기도 했다.

유통업계 대모로 불렸던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은 올해 개인 비리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사진제공=뉴시스>

재계 여성 리더들의 동반 몰락

재계 역시 여성리더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모습이다. 2016년에는 그동안 재계에서 두각을 나타내 온 경제계 여성리더들이 동반 몰락하기도 했다.

한때 국내 해운업계를 좌지우지 하던 현정은 전 현대그룹 회장과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이 나란히 해운업과 결별했다. 최 전 회장의 경우 한진해운 부실 책임론에 휩싸이며 아직까지도 세간의 지탄 대상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은 한진해운 부실경영 관련 재판 회부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1990년대 재계 1위 그룹이던 현대그룹의 현정은 회장에 대해서도 현대상선의 그룹이탈 등에 비춰 “‘뚝심’ 이미지와 달리 경영능력은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국내 유통가 대모(代母)로 불렸던 신영자 전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은 개인 비리 혐의가 밝혀지며 노년에 구치소 생활을 시작하기도 했다.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 함께 국내 유통업계를 양분했던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이 횡령과 배임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정·재계 여성리더들의 잇따른 몰락 속 일부 남성들 중심으로는 ‘여성혐오’ 현상이 다시금 커지고 있기도 하다. 특정 여성들의 실수와 실패를 여성계 전체의 문제로 확대 해석, 여성비하성 발언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여성계 내에서는 “박 대통령을 포함한 일부 여성의 실패가 여성 전체의 실패도 아니며 그들에게서 여성 대표성도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여성리더십의 재조명이 필요한 시기”라는 의견들이 늘고 있다.

여성리더십 실종

지난 18대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을 뽑았다는 40대 여성 정모씨는 그 이유로 “남성 중심의 우리 정치에서 ‘선거의 여왕’으로 집권여당을 이끈 포용력 있는 리더십과 정치경력을 높이 평가했다”고 말했다.

30대 초반의 여성 한모씨는 “우리나라에도 독일의 메르켈 총리 같은 여성 리더가 있으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며 “생애 주기별 복지와 여성정책이 보다 잘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로 뽑았다”고 밝혔다.

대선 이후 4년여가 흐른 지금, 이들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다. 오히려 한국의 양성평등지수는 박 대통령 취임 후 후퇴했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 10월 발표한 ‘세계 성격차 보고서’에서도 한국의 성격차 지수는 조사대상국 145개국 중 116위였다. 박 대통령이 당선된 2012년 108위보다 순위가 더 떨어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태 발발 후로는 여성 정치인에 대한 기피가 더욱 늘어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박근혜 대통령을 배출한 새누리당 내 변화다.

지난 14일 새누리당에서는 원내대표 경선전이 펼쳐졌고, 친박 후보로 나선 정우택 의원이 비박 후보였던 나경원 의원을 상당히 큰 격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범 친박계 의원실의 관계자는 ‘정국상황상 비박이 유리할 것’이란 당초 예상과 달리 원내대표 경선에서 정 의원이 승리한 것을 두고 “당 내부상황은 그렇지 않았다”며 “나 의원 낙선에는 여성 정치리더에 대한 기피가 존재했다”고 언급했다.

“여성정치인의 대표격이던 박근혜 대통령의 실정이 공개된 현재 당내에서조차 여성정치인에 대한 평가가 땅에 떨어졌다”는 그는 “여성정치 리더에 대한 반대가 의원 개인의 정치인생에 장애가 될수 있기에 이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았던 것 뿐”이라 말하기도 했다.

올해는 일부 남성들 중심으로 불거진 여성혐오 현상에 대해 여성계 역시 적극적으로 맞대응하는 모습이 자주 연출됐다. <사진제공=뉴시스>

여성혐오 상승

여성리더 몰락과 여성리더십 상실은 우리 사회 내 여성혐오 현상 증가로도 이어지는 모습이다.

지난 5월 17일 서울 강남역 인근 공용화장실에서는 한 20대 여성이 무참히 살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 직후 세간에는 피의자의 정신병 병력과 더불어 그가 심각한 여성혐오증을 품고 있었다는 게 공개됐고, ‘우리 사회 내 여성혐오가 살인까지 부를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란 사실에 많은 이들이 충격에 빠졌다.

여성혐오 이른바 ‘여혐’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른 것으로 이는 박근혜 대통령 게이트 발발 후 더욱 확산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촛불집회가 한창인 최근에는 “여혐이 광장으로 뛰어 나왔다”는 지적들이 쏟아지고 있다. 박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며 그와 비선실세로 지목된 최순실씨 등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수많은 푯말에서 여성성만을 부각하는 ‘XX년’ 등의 문구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 한 유명가수는 집회용 노래를 만들며 여성비하성 가사를 집어넣어 파문이 일기도 했다.

‘일반화’ 경계 목소리 커져

박근혜 대통령의 실패와 그에 따른 사회적 비난이 고조되자 여성계 내에서는 이번 사태를 일반화해 해석하는 오류는 피해야 할 것이란 의견들이 늘고 있다. 박 대통령의 실패가 여성리더십의 실패는 아니란 지적이다.

국회 여성가족위원장인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탄핵 표결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처음부터 허구라고 생각했다”며 “이런 사태가 벌어진 상황에서 앞으로 여성정치 리더십이 해야 할 일이 더 많다”고 말했다.

이복실 전 여성가족부 차관 역시 “박근혜 대통령으로 인해 여성리더십에 대해 회의를 갖는 이들이 있지만, 수많은 리더들을 본 결과 리더십의 차이는 성별이 아니라 개인성격에 달려 있다”며 “박근혜 대통령 탄핵정국이 ‘여성은 리더가 될 자질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되지 않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 전 차관은 “이분(박근혜 대통령)이 문제가 있었으니까 여자는 다 그럴 것이라는 일반화는 고정관념의 또 다른 이름”이라며 “여전히 여성은 잘 해낼 수 있고 정·재계의 여성 리더십이 필요하다” 강조했다.

김은경 세종리더십개발원 원장은 최근 열린 한 시국토론회에 참석해 “구조적 측면에서 현재의 위기는 여성정치의 위기가 아니라 남성 중심의 구태의연한 정치가 부른 위기”라 언급하며 “과다 대표된 남성과 과소 대표된 여성이 만들어낸 위기이자 무관심과 혐오가 초래한 예견된 위기”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김 원장은 “정치 참여 확대를 목표로 한 노력이 더욱 필요한 상황에서 여성시민의 요구와 불만을 정책적으로 이어줄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할 정당이 정치교육의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같은 토론회에서 윤여진 언론인권센터 사무처장은 “여성 대통령으로서 한게 없기 때문에 여성정치가 위기라고도 할 수 없다”고 말한 뒤 “그런 측면에서 제대로 된 여성정치인이 할 일 많다. 그 임무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신장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성계 일각에서는 “박 대통령이 여성운동의 역사와 성과에 무임승차해 당선됐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최순영 전 민주노동당 의원은 “박 대통령은 여성정치인이라기 보다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는 자산을 발판 삼아 지역주의에 기대어 성장한 구시대적 정치인”이라고 꼬집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도 “박근혜 대선캠프에서는 준비된 여성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액세서리처럼 활용했을 뿐 실제 성공요소는 아버지 시대의 향수를 자극하고 유신시대의 인물을 재활용한 것”이라면서 “박 대통령의 성공이 여성성 덕분이 아니듯 그의 실패를 여성정치의 실패로 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권명아 동아대 교수 또한 “박 대통령은 엘리트 여성이면서 부모를 일찍 여의고 혈혈단신으로 인고의 시간을 견딘 여성이라는 비엘리트적 이미지를 동시에 갖고 있다”며 “박 대통령은 부드러운 외모를 제외하면 리더십 부문에서 여성적이라 통칭되는 특성을 찾긴 어렵다. 하지만 성별화된 고정관념이 갖고 있는 여성성을 적극 활용해 ‘이미지 정치’를 해왔다”고 분석했다.

한편 여성계 내부적으로는 박근혜 대통령과 선긋기는 물론 여성리더십 재육성을 위한 움직임도 다시금 활발해지고 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각 분야를 대표할 여성리더를 다시금 키워 나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여성변호사회 사무차장을 맡고 있는 임지영 변호사의 경우 “앞으로 100년간은 여성대통령이 나오기 어렵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성리더십에 대한 믿음도 땅에 떨어져 버렸다”면서도 “리더십의 주체는 없다. 누구나 자기 위치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지적하며 특정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여성리더십 부재 우려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는 이어 “지식기반 및 창조경제 시대에는 경청과 의사소통 등 사회적 기술을 가진 리더가 필요하다”며 “덕을 갖추고 후배들의 조력자가 될수 있는 새로운 여성리더의 출현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영 기자  young@wsob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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