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소비자신문]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누구의 머리 위에 이글거리나

피어린 항쟁의 세월 속에

고귀한 순결함을 얻은 우리 위에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누구의 앞길에서 환히 비치나

눈부신 선조의 얼속에

고요히 기다려온 우리 민족 앞에

숨소리 점점 커져 맥박이 힘차게 뛴다

이 땅에 순결하게 얽힌 겨레여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

 

숨소리 점점 커져 맥박이 힘차게 뛴다

이 땅에 순결하게 얽힌 겨레여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

 

2024년이 밝았다. 연초가 되면 새 각오를 다지고 한해 계획도 세운다. 이럴 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노래가 있다. 김민기 작사·노래, 송창식 작곡의 ‘내 나라 내 겨레’다. 장엄한 맛이 나고 힘이 솟는 조국찬가다.

“애국가보다 더 마음에 든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민중가요다. 4분의 4박자로 경쾌하면서도 힘차게 나가는 이 곡은 새해의 밝고 활기찬 메시지가 담겨있어 신년행사나 모임에 어울린다.

이백천 PD 아이디어에 젊은 가수들 동참

‘내 나라 내 겨레’는 1970년대 초 음악평론가 이백천(李白川, 1933년 황해도 백천읍 태생)이 이끌었던 ‘Campus Crusador’(통기타그룹의 대학순회공연팀) 팀송(Team Song)으로 불렸던 곡이다.

노래는 그 무렵 우연한 기회에 만들어졌다. 이백천 동양방송(TBC) PD 겸 사회자(MC)와 정홍택 한국일보 기자(전 한국영상자료원 이사장)가 아이디어를 내고 1970년 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젊은 가수들이 참여해 태어났다.

가깝게 지냈던 이 PD와 정 기자는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났다. 이 PD는 대학생 김민기, 양희은 등을 천재음악인이라고 소개했다. 연예담당이었던 정 기자는 가수, 배우들과 친분이 두터운 마당발이었다.

그는 잠재력이 큰 젊은이들에게 마음이 끌려 “전국 대학을 돌며 공연하는 통기타팀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내 나라 내 겨레’는 그 팀이 공연 마지막 순서에 기타를 치며 관중과 다함께 부를 마무리노래(Ending Song)가 필요해 만들어진 것이다.

‘선 작곡, 후 작사’…1시간여 만에 노래 완성

노래가 태어나기까지엔 에피소드가 많다. 1971년 어느 날 김민기,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 조영남, 임백천 등이 정 기자와 만났다. 연예계에 영향력이 큰 정 기자는 “미국의 공화당찬가멜로디에 가사만 붙여 조국찬가라 부르지 말고 우리의 진정한 조국찬가를 만들자”고 제의했다.

그는 “노래를 만드는데 24시간 주겠다”고 말했다. 훗날 국내 최초 대중음악감상실 세시봉의 멤버가 된 젊은 음악인들은 서울시 충무로 라이온스호텔 3층에 방 2개를 빌려 합숙에 들어갔다. 하룻밤을 묵으며 노래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안 돼 송창식이 곡을 만들고 김민기가 노랫말을 지었다. 제목은 ‘동해의 태양’. 이듬해 제목이 바뀌었지만 그렇게 태어난 게 ‘내 나라 내 겨레’다.

노래가 빨리 만들어진 건 작곡이 먼저 된 덕분이었다. 작사 후 곡을 붙이는 음악계 관행과 달리 ‘선 작곡, 후 작사’가 된 것이다. 송창식·김민기의 순발력과 뛰어난 음악실력, 제대로 된 조국찬가를 만들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한몫했다. 둘의 손발이 맞은 건 두말할 것 없다.

작곡이 먼저 될 수 있었던 건 1971년 송창식이 바닷가로 캠핑을 갔을 때의 악상이 머리에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래밭에서 갑자기 나라에 대한 노래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미국 등 외국에선 국가(國歌)를 대중가수들이 자유롭게 부르고 국가찬가도 있는데 우리는 왜 그렇지 못할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 떠오른 악상이 곡의 바탕이 된 것이다. 그는 호텔에서 노래제목부터 정해놓고 순식간에 작곡했다. 송창식은 “곡을 만들었는데 가사를 붙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멜로디를 들어본 김민기는 1시간여 만에 노랫말을 썼다. 동해의 떠오르는 태양을 모티브로 삼아 우리 민족의 역동성을 가사에 담은 것이다. 중·장년층에게 피 끓는 감성과 뜨거운 조국애도 배어있었다. 작사는 호텔방에서, 작곡은 바닷가에서 이뤄진 셈이다.  

그렇게 태어난 노래는 여러 가수들이 줄줄이 취입했을 만큼 사랑받았다. 맨 먼저 조영남이 1971년 ‘동해의 태양’이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듬해 송창식이 제목을 ‘내 나라 내 조국’으로 바꿔 자신의 2집 음반에 실었다. 내레이션(낭송)부분이 빠진 채였다.

1974년 남자포크가수 윤지영의 2집 음반(‘고향 가는 길’)에선 내레이션이 김민기 목소리로 실렸지만 검열 때문에 가요시장에선 사라졌다. 김민기는 공들였던 윤지영마저 자취를 감춰버리자 1993년 자신의 작품음반에 이 노래를 담았다. 제목은 ‘내 나라 내 겨레’. 내레이션부분도 되살려 넣었다.

길지 않으면서도 감흥을 주는 내용으로 처음 곡을 만들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나의 조국은, 나의 조국은 저 뜨거운 모래바람 속 메마른 땅은 아니다. 나의 조국은 찬바람 몰아치는 저 싸늘한 그곳도 아니다. 나의 조국은, 나의 조국은 지금은 말없이 흐르는 저 강물 위에 내일 찬란히 빛날 은빛물결”로 나간다.

이후 윤형주, 김세환, 양희은, 한영애, 조항조, 김광석, 임태경, 홍경민, 김종서, 노찾사 등도 무대에서 부르거나 리메이크음반을 냈다. 대학가의 오랜 애창곡으로 각종 행사 때 빠지지 않는다. 정계, 관계, 학계, 노동계 사람들도 자주 부른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전직 7선 국회의원), 유은혜 전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등의 애창곡이기도 하다.    

‘내 나라 내 겨레’는 제야타종식, 시무식, 취임식, 출정식, 음악회, 연주회 때 배경음악이나 합창, 독창, 중창, 연주형태로도 등장한다. 노랫말에 깊은 의미가 있고 뭔가 찡한 메시지를 준다는 평가에서다. 신년음악회, 광복절 축하공연, KBS ‘가요무대’ 프로그램 등 각종 무대 단골곡이다.

1998년 2월 25일 오전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식 땐 축가로 성악가 조수미, 고성현과 연합합창단이 불렀다. 2012년 12월 19일 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당선 축하행사’ 때도 테너 김남두, 류정필, 진성원이 열창했다.

울릉군 북면 안용복기념관 초입에 노래비

울릉군 북면 안용복기념관 초입에 가면 ‘내 나라 내 겨레’ 노래비가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경북도가 2020년 8월 8일 ‘섬의 날'을 맞아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울릉도에 노래비를 세움으로써 동해의 가치와 나라의 희망을 되새긴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특히 안용복기념관은 희생과 고난으로 독도를 지켰던 조선 숙종 때의 인물 안용복을 기념하는 공간이자 울릉도에서도 독도와 일출이 잘 보이는 장소로 노래비의 상징성과도 잘 어울린다.

노랫말을 쓴 김민기는 1951년 3월 이리시(현재 익산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입학직전 서울로 이사해 경기중·고를 나왔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과 관심을 보인 그는 서울대 미대(회화학과) 재학 중이던 1971년 저항시인 김지하(1941년 2월~2022년 5월)를 만나면서부터 역사와 현실에 인식의 눈을 떴다.

1970년대 ‘대항적 대중가요’ 기수로 꼽힌다. 대학을 다닐 때 음악그룹 ‘도비두’를 만들어 노래활동을 했다. 그 무렵 서울재동초등학교 동창인 양희은에게 ‘아침이슬’ 곡을 줘 1970년 발표됐다. 1991년 3월 15일 서울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을 연 그는 1993년 22년 만에 독집음반을 내고 ‘겨레의 노래사업’을 펼쳤다. 이후 뮤지컬 ‘개똥이’, ‘지하철 1호선’ 등의 연출활동을 의욕적으로 했다.

곡을 만든 송창식은 1947년 2월 인천에서 경찰관아버지의 1남1녀 중 맏이로 태어나 서울예술고를 졸업했다. 1967년 가수 윤형주와 노래그룹 트윈폴리오를 결성, 이듬해 ‘트윈폴리오 1집’ 음반과 함께 ‘하얀 손수건’으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1970년 솔로가수가 돼 ‘피리 부는 사나이’(1974년)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75년 ‘왜 불러’로 대박을 터뜨려 여러 상을 받으면서 가요계를 휩쓸기도 했다. 1978~1980년 MBC 10대 가수상을 받았다. ‘고래사냥’, ‘그대 있음에’, ‘날이 갈수록’, ‘사랑이야’, ‘상아의 노래’, ‘슬픈 얼굴 짓지 말아요’, ‘우리는’, ‘푸르른 날’, ‘가나다라’, ‘한번쯤’ 등 히트곡들이 많다.

왕성상 언론인/가수  wss4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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