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회장은 20여 년 전 회사를 창립할 때 여성인데다 돈도 없고 임신까지 한 어려운 상황에서 맨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지금의 성공에 이를 수 있었던 비결로 환경에 쉽게 적응하고, 대결하기보다는 포용하려는 여성만의 강점을 적극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IMF 총재가 리먼 브라더스가 아니라 시스터즈였더라면 지금의 경제위기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회변화에 여성성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그는 직원의 80%를 여성으로 채우고, 임원진을 꼭 여성을 배치하는 원칙을 고수한다. 그런데 ‘왜’ 대다수의 기업은 성주그룹처럼 하지 않는 걸까?

 

과거 유리천장 같은 절대적인 장벽은 사라졌지만, 아직까지 여성이 사회 초년병으로 입사해 CEO급에 오르는 길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로와 같다. 출구는 존재하지만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여 그 길을 찾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고위직 여성비율이 아시아에서 ‘꼴찌’인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민간과 공공영역 가릴 것 없이 여성인력의 ‘절대 수’가 지나치게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2013년 12월말 기준), 코스피 상장기업 중 500인 이상 기업 170개사 중 여성임원이 1명도 없는 기업은 111개로 65.7%에 달했다. 여성임원이 1명인 기업은 17.8%인 30개사였다. 2명 이상의 여성임원이 있는 기업은 16.5%에 불과했다.

여성임원 품귀현상은 사기업에만 한한 것이 아니다. 30대 공기업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인 결과, 현재 여성직원 1만1614명 중 단 2명만 임원직을 맡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올 6월 기준 30대 공기업의 임직원 현황을 분석한 결과 30대 공기업 임직원 9만7748명 중 여성 직원은 1만1614명이다.

전체 임직원의 11.9%에 해당하는 수치다. 10대 그룹 상장사의 여성 직원 비율은 20.9%를 기록했다. 여성 대통령을 탄생시킨 나라치고는 기업 내 고위직 여성의 위상은 너무 초라한 셈이다. ‘여성리더십의 만개’라며 잔치 분위기에 휩싸일 수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시대가 바뀌면서 남성보다 탁월한 성과를 내는 여성 국가지도자나 기업경영자가 늘어나고 있지만 여성 리더십에 대한 불편한 시각이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여성이 경제‧산업계에서 강력한 파워를 갖는 이른바 ‘위미노믹스’ 시대가 열리고 있지만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어 보인다.
 

실제로 여성 리더가 탄생할 때마다 언론매체가 앞 다투어 ‘여성’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대서특필하는 것 자체가 여전히 양성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라는 게 여성학자들의 주장이다.

파우스트 하버드대 총장도 기자회견에서 ‘여성총장’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자 “나는 하버드대 ‘여성 총장’이 아니라 하버드대 총장”이라고 말했다. 남녀 성 역할을 고정적으로 인식하는 조직문화도 장벽이 되고 있다.

사실 고위직에 올라갈 수 있는 정도의 경력을 가진 여성은 일‧가정 양립의 고민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연령대에 속한다. 우리나라보다 성 평등한 영국과 미국에서도 중간관리직을 거친 40~50대 여성들이 최고위직으로 올라가기 직전에 그만두는 현상이 발견된다.
 

이 현상을 연구한 마이니에로와 설리반은 고위급 여성인력의 유출을 막고 의사결정 과정의 성별 다양성을 증진하려면 최고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남성적인 조직의 제도와 관행, 문화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22일 여성가족부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위탁한 ‘여성고용 확대가 기업의 경영성과에 미치는 효과’ 세미나에서 박건 여성정책전략센터 전임연구위원도 “성별 다양성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한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즉 성별 다양성과 가치를 전사적으로 통합하고, 체계적인 계획과 노력을 통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박 위원은 “성별 다양성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을 경우 여성 인재의 유출과 재정적 손실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무엇을’보다는 ‘어떻게’

대다수 기업은 여성관리자 네트워크의 일환으로 일 년에 한두 번 모여 CEO와 식사하거나 간담회 정도의 행사를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전문가들은 이 방법이 기업 이미지엔 좋을지 몰라도 실질적 효과는 없다는 평가다.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가 성별다양성 통합의 키를 쥐고 있는 셈이다.
 

김양희 젠더앤리더십 대표는 “성별 특수성이 장애가 되지 않도록 조직과 사회의 관행‧문화‧제도가 개선돼야 한다”며 “다름에 대한 적극적인 통합이 좋은 집단을 만들고, 다르다는 것을 경쟁력으로 받아들여야 기회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문화 자체가 ‘다름’이 ‘차별’의 원인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 흔히 ‘여자를 고쳐야 한다’는 여성의 부적응을 문제로 보는 시각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만약 산업혁명 이후 조직을 이루어 일하기 시작한 이들이 여성이었다면 오늘날 조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생각해본다면,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은 여성의 부적응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과 다르기 때문에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달라 더 잘할 수 있다는 관점의 변화가 출발점이다.

김 대표는 “양성평등 실천이 조직의 경영방침에 완전히 통합되려면 성별 다양성을 통합하는 생태계 구축이 필요하다”며 “무엇보다 양성평등 실천에 대한 CEO의 의지와 지원이 정확하게 표현되고 전 직원에게 전달돼야 한다”고 말했다.
 

더불어 “여성인재 유출방지를 위해선 일․가정 양립 지원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조직의 근본적인 변혁을 위한 종합적인 정책방침과 실천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중간관리자가 임원으로 승진 시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연령과 경력단계, 업종, 교육수준, 경력 열망, 여성 멘토 수라는 결과가 나왔다. 특히 직급이 높을수록 낮은 직급에 비해 교육 수준 등 인적자본의 특징보다 네트워크나 멘토와 같은 관계적 차원의 특징이 여성관리자 승진에 더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강민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연구 결과를 통해 여성 관리자의 경력단계와 생애주기에 맞춤형 전략을 모색해볼 수 있다”며 “관리직으로 처음 진입하는 시기와 결혼, 임신, 출산 등 생애주기적 사건이 맞물리는 초기경력 단계에서는 일‧가정 양립제도 도입과 고용친화적 개선이 효과적이며, 중기에는 네트워킹과 멘토링을 강화하는 것이 여성인력 개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저성장의 늪에 빠진 주요국에서 여성의 잠재력에 주목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미래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지식을 기반으로 한 21세기는 여성의 섬세함과 유연성,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강조되는 시대”라고 오래 전부터 주장해왔다. 이를 바탕으로 엘빈 토플러는 “사회가 여성 지도자를 받아들일 충분한 준비가 돼 있어야 하고, 여성들이 정치에 좀 더 많이 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여성관리자 비율이 증가하거나 여성임원이 있는 기업이 그렇지 않은 기업에 비해 기업성과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자기자본이익율(ROE), 매출액수익률(ROS), 매출액증가율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또 전체 직급의 여성비율도 중요하지만 특히 의사결정 지위의 여성이 존재하거나 많은 기업일수록 재무성과가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는 코스피(KOSPI) 상장기업 중 500인 이상 기업 170개사를 대상으로 최근 5년간 여성근로자 및 관리자 비율이 증가한 기업과 감소한 기업의 주요 재무성과를 비교했다.

ROE 평균은 여성관리자 비율이 증가한 기업 집단이 감소한 기업 집단보다 2배 이상 높았다. ROS 평균도 여성임원을 1명 이상 보유한 기업이 여성임원이 전무한 기업보다 2배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재무지표 감소 비교에도 여성인력 활용 우수기업(여성관리자 비율 상위 25%)이 부진기업(5년간 여성관리자 비율 0%)보다 상대적으로 덜 감소했다.
 

연구를 주관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강민정 박사는 “여성관리자 및 여성임원급의 활용이 기업성과 향상의 주요 요인으로 나타났다”며 “여성 인력의 적극적인 활용이 장기적으로 기업에 도움이 되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밝혔다.
 

여성가족부는 이번 연구결과를 토대로 “장기적 관점에서 기업 내 여성중간관리자 육성을 통해 고위직 여성인력을 확대하는 것이 기업의 경영성과를 높일 수 있다”며 “중간관리자로 성장하는 시기에 발생하게 되는 경력단절을 예방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