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년간 깨지지 않았던 강력한 방탄 유리천장을 깨고 대한민국 1호 여성 은행장이 된 권선주 기업은행장 얘기다. 여성 특유의 부드럽고 꼼꼼한 리더십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지만 권 행장은 자신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여 후배들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

 

권 행장은 평 행원으로 입사해 계단을 오르듯 차근차근 입지를 높인 끝에 행장이라는 최고의 위치에까지 올랐다. 그렇기에 후배들이 무슨 고민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조직이 어떻게 커왔으며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난 9월 1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과 아시아개발은행이 개최한 ‘2014 아시아 여성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권 행장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여성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메시지를 전했다.
 

이번 행사는 아시아개발은행 대표적 지식공유 프로그램인 아시아 리더십 프로그램(Asia Leadership Program)의 일환으로 양성평등에 관한 주요현안과 여성 지도자로서의 경험을 서로 공유하고, 여성들의 역량강화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17개국의 고위급 여성 공무원 25명이 참여한 가운데 첫날 권 행장은 여성의 사회진출에 대한 인식과 환경이 크게 개선되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꼬집었다.
 

공백기 후의 직장 적응문제, 남자동기들과의 격차, 승진에서의 불이익이 큰 걱정거리라는 것. 실제로 권 행장과 같이 입사한 55명 중 여성 동기 4명은 결혼과 동시에 퇴사했다.

권 행장은 육아휴직을 예로 들며 “나 또한 엄마가 되고 보니, ‘혹시 경력이 단절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고 회고했다. 남성들은 대개 직장이라는 고속도로에 들어서면 중단 없이 완주하지만 여성들은 경력단절과 재도전 즉, Off-ramp(진출램프)와 On-ramp(진입램프)를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권 행장은 “여자는 가슴에 사표를 담고 산다고 한다. 그만큼 육아와 일의 양립을 고민하며 힘들어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쉽게 포기해서도, 생각 없이 포기해서도 안 된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한 것보다는 안한 것을 후회하는 경우가 더 많다. 갈등이 생길 때마다 10분 후, 10개월 후, 10년 후의 모습(수지 웰치, 10-10-10법칙)을 그려보고 결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권 행장은 지난해 말 국내 최초의 여성 은행장 탄생스토리를 전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보수적인 문화가 지배적인 은행경영을 ‘여성이 해낼 수 있을까’ 하는 편견을 겪어내기도 했다.
 

그는 “지금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까진 충분하지 않다. 지금도 많은 여성 후배들이 자녀양육으로 일을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정부 정책에 의해 여러 제도가 도입되고 있지만 무엇보다 여성친화적인 문화가 모든 기업에 정착되는 게 중요할 것”이라고 피력했다.

 

 

이날 한 아태지역 여성이 일·가정 양립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을 묻자 권 행장은 “가족의 건강은 여성이 일을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라며 “건강과 직결된 아침식사는 내손으로 해서 먹이자는 생각에 어지간한 일 없인 거르지 않고 직접 준비한다”고 답했다.
 

권 행장은 지금도 매일 아침 5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정성이 담뿍 담긴 아침상을 차리고, 늦은 시간 지친 몸으로 들어가더라도 손수 장을 본 후 귀가한다. 그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게 중요하다”며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일을 해야 하고, 회사와 가정에서 공과 사를 구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권 행장은 미장원에 머리하러 갈 때도 1주일 치 밥에 넣을 밤을 들고 가서 기다리는 시간 동안 밤을 까곤 했다. 아이들 건강을 위해 밤을 넣은 잡곡밥을 짓는 일과 탄산음료 대신 보리차를 끓여 먹이는 일 두 가지는 절대 거스르는 법이 없었다.
 

또 다른 참석자가 여성행장의 리더십에 대해 어떤 편견이 있었냐고 질문하자 “여성이 남성보다 네트워크가 약하고 추진력이 부족한 것 아니냔 목소리가 많았다”며 “기존에 여성은행장이 없었기 때문에 이 같은 우려는 당연하지만 앞으로 실천과 행동으로 보여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권 행장은 금융인으로서의 자질에 여성의 장점을 결합할 경우 최고의 금융인이 될 수 있다고 전하며 “여성은 경청능력이 뛰어나고 수평적인 리더십을 통해 대인 간 소통을 원활히 해주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행사에는 젠더와 개발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아태지역 여성 지도자들도 참여했다. 칸타 파비 잉 캄보디아 여성부 장관, 사파나 프라단 말라 이퀄리티나우(Equality Now) 집행위원회 위원장(전 네팔 제헌의회 의원), 란자나 쿠마리 인도사회연구센터 소장, 타마라 아베드 방글라데시 BRAC Enterprise 선임국장, 주디스 윌리엄스 젠더와 협상 컨설턴트, 쉬린 라티프 아시아개발은행 선임자문관 등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