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소비자신문] 내 마음이 가는 그곳에 /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갈 수없는 먼 곳이기에 / 그리움만 더하는 사람

코스모스 길을 따라서 / 끝이 없이 생각할 때에

보고 싶어 가고 싶어서 / 슬퍼지는 내 마음이여

미련 없이 잊으려 해도 /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가을하늘 드높은 곳에 / 내 사연을 전해 볼까나

기약한 날 우리 없는데 / 지나간 날 그리워 하네

먼 훗날에 돌아온다면 / 변함없이 다정하리라

음~음 음~음~음 음~음

신중현 작사・작곡, 장현 노래 ‘미련’은 젊은 시절 연인과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가요다. 가사내용이 절절하다. 1절 노랫말에 나오는 ‘갈 수 없는 먼 곳이기에 그리움만 더 하는 사람~’ 대목에선 안타까움, 슬픔, 그리운 그 옛날을 생각하게 만든다.

대중가요에 흔히 쓰이는 ‘사랑’이란 단어가 들어가지 않음에도 마음을 울린다. 옛 애인과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 ‘미련’ 노래를 부르고 듣는다는 사람도 있다. 노래가 흥겨운 건 16마디의 선율이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4분의 4박자, 슬로우고고 리듬으로 부르기 쉽고 듣기도 편하다.

김추자, 홍민 등도 취입

‘미련’은 1970년 여가수 임아영이 맨 처음 부른 원창자다. 그는 한양대 영문과 학생이었다. 사이키 델릭한 음색을 가진 그가 원창자이지만 빛을 보지 못했다. 김추자의 대를 이을 기대주로 이 노래를 가수데뷔곡으로 부른 그에게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노래 잘하는 여대생DJ’로 대중음악계에 소문이 났지만 노래는 뜨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시집을 가 버렸다. 요즘엔 그의 ‘미련’ 노래가 실린 LP앨범이 희귀음반으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원창가수 임아영 이후 주인을 잃은 ‘미련’은 여러 가수들이 리메이크해 불렀다. 원작자 신중현을 비롯해 장현, 김추자, 홍민, 임창제 등이 각자 목소리의 개성을 담은 음반을 냈다. 신중현이 작곡한 노래들은 ‘신중현 사단’ 가수들이 불렀다는 특징이 있다.

‘미련’을 부른 가수들 노래를 잘 들어보면 결이 다르다. 가요팬들은 그 가운데서도 장현 노래를 최고로 꼽는다. 그가 원창자로 잘못 아는 사람도 적잖다. 그 바람에 오랜 세월 올드팬들 사랑을 받는 추억의 명곡이 됐다.

“거의 매일 집에 와서 노래 달라고 졸라”

장현은 ‘미련’을 언제, 어떤 계기로 불러 히트했을까. 그 사연이 한 신문이 연재한 ‘록 대부 신중현의 나의 이력서’에 실렸다. “박인수가 사라지고 후속 남자가수가 없어 초조하던 터에 장현이 거의 매일 집에까지 와서 그 작품을 달라고 졸랐다. 둘은 정반대 인물로 특히 불화가 심했다.

천재적 소울가수 박인수가 장현을 무시했다는 표현이 옳다. 장현은 나의 세세한 주문에 그대로 따랐다. 그렇게 나온 ‘장현판 미련’은 결과적으론 대히트였다.”

장현은 느리고 편안한 목소리, 중저음의 절제된 창법으로 짙은 애수와 그리움, 쓸쓸함을 느끼게 해 듣는 이의 가슴을 울렸다. 보사노바(bossa nova)풍의 나직한 목소리는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보사노바는 높은 음 없이 소리를 내지르지 않고 부드럽다. 삼바에 현대재즈감각이 접목돼 발달한 새 대중음악이다. 드럼의 가죽을 세게 치는 대신 금속테두리를 가볍게 두드리는 연주법이다. 그 바람에 장현은 “이브 몽땅을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여백의 미를 물 흐르듯 은근히 나타내는 음색이 돋보인다.

장현이 ‘미련’을 발표한 건 1972년 10월. ‘장현 and The Man’ 음반 앞면(SIDE1) 세 번째 곡으로 실렸다. 그해 방송사 라디오상을 휩쓰는 등 엄청나게 인기였다. 노래는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꾸준히 불리고 있다.

2021년 11월 방영된 TV조선 ‘내일은 국민가수’ 우승자 박창근이 본선 2차 데스매치(deathmatch)에서 뛰어난 가창력으로 ‘미련’을 불러 노래는 더 유명해졌다. 최근엔 여자재즈가수 웅산(雄山, 1973년 4월~/대학교수 김은영)도 불러 새로운 느낌을 준다.

‘미련’은 영화에서도 흘러나왔다. 2003년 1월 30일 개봉된 ‘클래식’에서다. 1960년대 두 연인의 슬픈 사랑과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란 주제를 담은 로맨스영화다. 2020년 8월 개봉한 독립영화 ‘남매의 여름밤’(각본·감독 윤단비)에도 나온다.

맛이 다른 세 가수의 노래가 이채롭다. 영화 초반부엔 임아영, 중반부엔 장현, 후반부엔 김추자 노래가 흐른다. 영화의 처음과 끝을 가로지르며 주제가(OST) 역할을 한다. 세 버전의 노래는 관객들에게 다양한 감정선을 건드린다. 윤 감독은 “시대성이나 향수를 드러낼 수 있는 노래를 찾다가 그리움의 정서를 담고 있어 ‘미련’을 영화에 넣게 됐다”고 설명했다.

가수 장현은 1945년 4월 27일 경북 울진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장준기. 울진 매화중학교 2학년 때 서울 청운중학교로 전학,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광이었다. 고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별세하자 진로를 바꿔 일찌감치 무대에 섰다.

연예명 ‘장현’은 그가 지은 것이다. 한문으로 ‘검을 현(玄)’자를 썼다. 외우고, 부르기 쉽고, 연예인색깔도 있고 해서 다. 명지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그는 26살 때인 1970년 대구수성관광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친구소개로 신중현의 눈에 띄어 가수로 데뷔했다.

대구지역 방송사를 찾은 신중현이 호텔에 들려 노래를 부르는 무명의 장현과 인연이 된 것이다. 신중현은 일주일간 호텔에 머물며 그를 위한 곡을 지었다. 장현의 데뷔곡 ‘기다려주오’를 비롯해 ‘마른 잎’, ‘나는 너를’, ‘석양’, ‘안개 속의 여인’ 등 다섯 곡이다. 이들 노래는 1970년 11월 장현의 데뷔독집음반에 실려 발표됐다. 장현은 ‘신중현 사단’ 소속가수로 활동하며 핵심멤버가 됐다.

신중현은 ‘한국 록의 대부’, ‘대중음악의 거인’으로 통한다. 1938년 서울시 신당동에서 태어난 그는 고교중퇴 후 음악에 빠져들었다. 1960년 미군정보부 소속 ‘시빌리언클럽’에서 처음 기타독주공연을 해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1963년엔 국내 첫 록그룹 ‘애드포(Add4)’를 만들어 화제가 됐다.

사업가로 변신한 장현, 2008년 별세

인생에서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신중현과 더불어 잘 나갔던 장현에게 어느 날 먹구름이 덮쳤다. 1975년 ‘대마초 파동’에 얽힌 것이다. 그는 김추자, 신중현 등과 함께 구속되면서 가요계를 떠났다. 신중현과 음악스타일도 달라 인연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키우는 가수의 노래를 프로듀싱해주는 신중현과 달리 장현은 곡만 받아 자기스타일로 부르려 해 틈이 생긴 것이다.

결국 가수 삶을 접은 장현은 사업가로 변신, 1976년 삼성봉제공업회사를 차렸다. 삼성물산계열의 섬유수출업체로 생산직원만도 3백여 명이었다. 그는 미국을 오가며 사업에 성공했다. 한해 1천500만 달러 매출을 올려 대통령표창장까지 받았다.

KBS 1TV ‘보도본부 24시’에 나가 인터뷰도 했다. 그는 축구, 골프 등 스포츠에도 일가견 있었다. 1987년 경기도 광주 곤지암 중부컨트리클럽(CC)이 문을 열 때 초대챔피언을 했다.

그러나 그의 몸에 갑자기 이상이 왔다. 1994년 위암 4기 판정을 받은 것이다. 그는 치료에 전념, 재기를 꿈꿨다. 병이 나으면 가수로 다시 일어서려고 2005년에 차린 라이브카페이름도 ‘미련’이었다. 하지만 암이 폐로 번져 2008년 여름 폐암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그해 11월 30일 서울원자력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63세. 보헤미안정서가 느껴지는 그의 노래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건 아무래도 미련이 남는다.

왕성상 언론인/가수  wss4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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