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소비자신문] 지슬못

-서하-

굴참나무 개가죽나무 아까시나무 소나무 잣나무가 초록 난필로 뭔가를 쓰는 최정산 뒷자락, 긴 문장 속 쉼표 같은 지슬못이 숨 쉬고 있다 

숙제 같은 일상은 상수리나무에 처억 걸쳐두고, 눈망울 또렷또렷한 돌멩이 베고 누워 옛 애인 생각도 한 움큼 해 보고, 낮달을 끌고 가는 개미와 팔씨름도 한판 하고, 주눅 들지 않은 내 방귀 소리 싱싱하게 날려 보내며, 무더기로 피어 하늘거리는 망초꽃에게 와락 속마음 들키고 싶은, 물비늘과 종일 뒹굴며 푹신 젖어 버리고 싶은, 

말할 수 없는 비밀 같은 지슬못이 내 이마에 손 얹을 때, 그 손목 맑고 투명해서, 한 박자 쉬어서, 지글지글 철이 든 정적에는 투덜대던 무릎도 쉼표를 찍는다 

1998년 시전문지 ‘시안’이 창간되고 이듬해 가을 제3회 신인상을 심사하는 마음은 자못 비장했다. 창간 1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 한국 시단에 정말 좋은 시, 좋은 시인을 배출해야 한다는 심적 압박 때문이었을까, 김명인, 김은자 교수와 함께 심사하면서 참 시간도 오래 걸렸던 기억이 새롭다.

시에는 서하, 홍은택, 류외향을, 평론에는 노철 교수를 뽑아놓고 심사평까지 쓰는 걸 마치고서야 우리 심사위원들은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서하 시인의 작품은 치열한 자기성찰과 절제된 감정, 번득이는 이미지가 돋보였음을,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당시 작품을 떠올리게 했다.

그동안 시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는데 이번 네 번째 시집 해설을 쓴 장옥관 시인이 “단어와 단어, 행과 행 사이를 성큼성큼 건너뛰는 시의 보폭이 경쾌하다”라고 평했으니 부럽기도 하다.

허형만 시인  hhmpoe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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