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소비자신문] 백마야 울지 마라

백마는 가자 울고 날은 저문데

거칠은 타관 길에 주막은 멀다

옥수수 익어가는 가을 벌판에

또 다시 고향 생각 엉키는 구나

백마야 백마야 울지를 마라

 

고향을 등에 두고 흘러가기는

네 신세 내 신세가 다를 게 없다

끝없는 지평선을 고향이거니

인생을 새 희망에 바라며 살자

백마야 백마야 울지를 마라

 

고삐의 방울소리 구슬피 들려

나그네 가슴 속을 슬프게 하나

희미한 등불 뵈는 마을을 찾아

오늘밤 꿈자리를 만들어보자

백마야 백마야 울지를 마라

강영숙 작사, 전오승 작곡 ‘백마야 울지 마라’는 대중가수 명국환(明國煥)의 데뷔곡이다. 1950년~60년대 우리나라 가요계를 풍미했던 그의 간판곡이기도 하다. 1954년 발표된 이 노래는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어도 한겨레로서 희망을 버리지 말자는 메시지가 담겼다. 리듬이 경쾌하고 전주와 간주도 흥겹다.

노랫말은 은유성 있는 한편의 시와 같다. 상징적 단어들이 곳곳에 나온다. ‘거칠은 타관 길’, ‘주막’, ‘끝없는 지평선’, ‘등불 뵈는 마을’ 등 우리들 삶이 베인 것들이다. 첫 소절 ‘백마는 가자 울고~’는 어디로 가자는 것일까. 북한에 있는 고향을 말한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후 노래를 만들거나 부른 음악인들 상당수가 북한출신이어서 향수어린 가사들이 담겼다. 그들에게 남한은 타관이었다. 노래 끄트머리의 ‘백마’는 백의민족인 우리 겨레를 말한다.

작사가들 모임인 노랫말연구회는 일부 가사내용이 현실과 맞지 않다고 지적한다. 1절의 ‘옥수수 익어가는 가을 벌판에’ 대목이다. 옥수수는 초여름에 익기 시작, 여름이 가기 전(대부분 7~8월)에 딴다. 가을벌판의 옥수수는 씨앗용이라는 게 전문가들 설명이다.

휴전 후 샛별악극단 들어가 노래취입

이 노래는 작곡가 전오승 씨 딸이 말띠 해(1954년)에 태어난 것을 기념해 만들었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옥희’역의 아역배우 전영선이 그의 딸이다.

명국환이 이 노래를 취입한 계기가 흥미롭다. 6·25전쟁 때 유격부대에 자원입대한 그는 정훈공작대원으로 서해안지역에 배치돼 노래를 불렀다. 일종의 가수역할이었다. ‘군번 없는 용사’로 전선을 누빈 그는 휴전 후 위문대가 해체되자 서울로 왔다.

대한민국제대장병보도회(이후 서울재향군인회) 주최 노래콩쿨대회에서 1등을 했다. 그는 입상을 계기로 샛별악극단에 들어가 연예활동을 했다. 그곳에서 가수 겸 배우 나애심의 소개로 그녀 오빠(작곡가 전오승)를 만나 이 노래를 취입, 크게 히트했다. 전쟁이 운명처럼 그의 삶을 바꿔놓은 것이다.

‘백마야 울지 마라’ 인기로 명국환은 전성기를 맞았다. 서울중앙방송국(현 KBS 제1라디오)의 ‘노래수첩’, ‘노래와 경음악’, ‘노래파티’ 등 가요프로그램에 자주 나갔다.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덕분에 그는 1955년 KBS전속가수로 뽑혔다.

그 무렵 생긴 신신레코드사로부터 전오승과 함께 입사제의를 받고 전속가수가 됐다. ‘전오승-명국환 콤비’는 잘 나갔다. 신신레코드 전속가수 1호곡 ‘방랑시인 김삿갓’을 비롯해 ‘공주의 비련’, ‘백제왕의 최후’, ‘내 고향으로 마차는 간다’ 등을 발표해 히트했다. 전속가수 전에 불렀던 영화주제가 ‘구원의 정화’도 음반으로 만들어졌다.

△유니버샬레코드사를 통해 발표한 ‘캬라반의 꿈’, ‘향수의 밤차’ △박춘석 작곡의 ‘흐르는 백마강’, ‘아라비아 야곡’ △파라마운트레코드사에서 발표한 ‘아리조나 카우보이’도 인기였다. 명국환의 목소리는 깔끔하고 맑다. 마지막이나 중간연결대목의 꾸밈 음이 많은 노래에서도 꺾기발성이 자연스럽다. 그가 취입한 드라마주제가, 영화주제가에도 민초들 삶이 배어있어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위로와 희망을 줬다.

정부의 애매모호한 노래심의로 갈등

명국환의 취입곡엔 에피소드가 많다. ‘방랑시인 김삿갓’(영화 ‘김삿갓’ 주제가)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애창곡으로 화제였다. ‘아리조나 카우보이’는 메이저리그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서 뛴 야구투수 김병현의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영국 마가렛공주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공주의 비련’도 사랑 받은 곡이다.

그는 정부의 애매모호한 노래심의기준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빅히트곡 ‘방랑시인 김삿갓’, ‘청춘의 삼색 깃발’ 등이 금지곡으로 묶이며 가수활동에 타격을 받았다. 공연 때의 애환도 적잖다. 지방공연 때 쇼 단장이 잠적, 개런티를 못 받아 빈털터리가 된 적이 많았다.

서울 갈 기차비가 없어 열차승무원에게 사정해 무임승차한 적도 있었다. 모직회사, 방직회사 같은 곳에선 출연료 대신 나일론옷감, 양말 등을 줘 주위사람들에게 선심 쓰기도 했다. 그는 가수로 뛰면서 주변사람들을 많이 챙겼다. 원로가수들 모임 동심회 회장으로 회원친목과 권익보호에 앞장섰다. 제10대 대한불자가수회장도 맡아 불우이웃돕기, 무의탁노인돕기 자선공연활동을 펼쳤다.

“혼자 산지 70년”…올 8월 19일 별세

노래주인공 명국환의 삶은 드라마 같다. 그는 1927년 1월 9일 황해도 연백군(現 황해남도 연안군) 연안읍에서 아버지 명원표, 어머니 지입분 사이의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냈다.

1948년 연안중학교 3학년 때 연안극장에서 열린 콩쿨대회 때 3등을 했을 만큼 노래를 잘 불렀다. 그러나 연백군청공무원으로 엄했던 아버지의 반대로 가수 꿈을 접어야했다. 그는 6·25전쟁이 나자 가족들과 남으로 왔다. 아버지는 합류 못했다.

그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누나 옷으로 여장까지 했다. 피난길에 가족들이 흩어져 혼자가 됐다. 살길이 막막해 그가 택한 건 입대였다. 강화도에 본부를 둔 8240KLO 유격부대에 들어가 정훈공작대 가수로 활동하다 해병대 병장으로 제대했다.

명국환은 올 8월 19일 오전 인천시 남동구 요양병원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화려했던 지난날과 달리 노년을 홀로 어렵게 살다 눈을 감은 것이다. 그의 별세 사실도 뒤늦게 알려져 대한가수협회가 9월 3일 부천시 송내동 휴앤유병원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주관, 국립괴산호국원에 모셨다.

그의 생전 고달팠던 삶이 2022년 12월 15일 MBN 밀착다큐멘터리 ‘특종세상’(561회)에서 다뤄졌다. 월 23만원 반지하 단칸방에서 어지럼증으로 리모콘과 휴대전화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는 “혼자 산지 70년 됐다”며 “21살에 결혼했는데 (아내가) 자궁 외 임신을 해 (아이들이) 그냥 다 가버렸다. 세 번 결혼했지만 모두 유산됐다. 팔자가 그런 모양”이라고 말했다. 2004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은 그는 북한에 있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환갑 때 삶을 되돌아보며 작사·작곡·취입한 것이다.

작사가 강영숙, 부여출신 시인 겸 소설가

‘백마야 울지 마라’ 작사가 강영숙은 ‘애수의 소야곡’ 노랫말을 쓴 이부풍(본명 박노홍, 1914~1982년)이다. 부여태생인 그는 시인이자 소설가다. 이노홍, 노다지, 이고려, 이사라, 화산월 등의 필명을 썼다.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나 만주 용정촌에서 소년기를, 청주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1931년 동아일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1937년 빅타레코드사 문예부에서 가요작사가가 됐다. 남인수의 히트곡 ‘애수의 소야곡’, ‘가거라 삼팔선’과 황금심 히트곡 ‘알뜰한 당신’ 등을 작사했다. 1943년 가극 ‘아리랑’ 각본을 써 극작가로도 돋보였다.

1960년 국제친선문화협회를 만들어 6·25전쟁 16개 참전국과의 문화교류사업을 벌였다. 누이의 과수원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한국레코드사・악극사・창극사・극장사 집필 중 별세했다.

작곡가 전오승은 1923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연주가이기도 한 그는 세고천, 세고석 등의 필명으로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2016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93세로 눈을 감았다. 

왕성상 언론인/가수  wss4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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