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소비자신문] 내가 왜 이럴까 오지 않을 사람을

어디선가 웃으면서 와줄 것만 같은데
차라리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던들
이 고통 이 괴로움 나에겐 없을 걸
장미빛 장미빛 스카프만 보면은
내 눈은 빛나네 걸음이 멈춰지네
허전한 이 마음을 어떻게 달래보나
내게서 떠나버린 장미빛 스카프
​
장미빛 장미빛 스카프만 보면은
내 눈은 빛나네 걸음이 멈춰지네
허전한 이 마음을 어떻게 달래보나
내게서 떠나버린 장미빛 스카프
장미빛 스카프

‘장밋빛 스카프’는 가수 윤항기(80)가 작사·작곡, 노래한 트로트곡이다. 4분의 4박자로 흥겹다. 그럼에도 노랫말내용은 그리 밝지 않다. 외로움과 허전함, 쓸쓸함과 애잔함이 묻어난다. ‘우리나라 1세대 싱어송라이터’ 윤항기의 대표곡이다.

이 노래는 1974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이듬해 발표됐다. 숨은 사연이 있다. 노래에 나오는 주인공은 윤항기의 아내(정경신)다. 5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초 총각인 윤항기가 음악그룹 키보이스로 활동할 때다.

그는 고정출연했던 서울 무교동의 한 클럽에서 우연히 한 여대생을 만났다. 그녀는 너무 아름답고 잘 생겼다. 윤항기는 한 눈에 반해  적극적인구애(求愛)를 펼쳤다. 사랑이 싹터 둘은 연인사이가 됐고, 만남이 거듭되면서 결혼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정 씨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지방에서 태어나 부모 없이 자란 윤항기의 직업, 학벌, 재산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무일품의 고아출신 딴따라’에게 부잣집 셋째 딸을 줄 수 없다며 만남을 말렸다. 하지만 정경신은 부모 말을 듣지 않았다. 겨울 어느 날 그녀 집에서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딸의 외출을 막아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한다며 머리카락을 잘라버렸다. 졸지에 그녀는 단발머리가 됐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 감동의 포옹 

사랑에 빠진 정경신은 삭발에도 개의치 않았다. 며칠 뒤 윤항기와 만났다. 머리카락이 잘린 그녀는 머리에 장미꽃색깔의 스카프를 두르고 나갔다. 추위도 막을 겸 머리카락이 잘린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둘은 감동의 포옹을 했다. 평소 스카프를 잘 쓰지 않았던 그녀의 얘기를 듣고 윤항기는 감동했다.

머리모습을 보고 속상했던 윤항기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죽든 살든 우리 그냥 같이 살자”고 말했다. 며칠 후 둘은 한밤중에 집을 나와 동거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4~5년이 흐른 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윤항기가 그때 사연을 악상으로 떠올려 만든 노래가 ‘장밋빛 스카프’다. 

노랫말엔 윤항기의 외롭고 허전했던 마음이 오롯이 담겼다. “장미빛 장미빛 스카프만 보면은 / 내 눈은 빛나네 걸음이 멈춰지네 / 허전한 이 마음을 어떻게 달래보나~” 대목에서 진심이 드러난다. 노래는 삽시간 히트곡으로 떴다.

그 바람에 서울 등 대도시 백화점과 명동을 비롯한 팬션가에선 장미꽃색깔의 스카프가 불티나게 팔렸다. 스카프장사들이 노래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새내기솔로가수 윤항기 이름도 전국에 알려져 스타가 됐다. 그는 ‘장밋빛 스카프’ 히트로 무척 바쁜 몸이 됐다. 자연히 집에 소홀해져 아내를 외롭게 만들었다. 한참 잘 나갈 땐 집에 한 달에 한번, 그것도 하루 잠깐 얼굴만 비치고 다시 나갔다. 육아는 모두 아내 몫이었다. 정경신 씨는 방송에서 “애들이 없었으면 벌써 도망갔을 것”이라며 힘들었던 그때를 떠올렸다.

그녀는 결혼한 사실을 숨겨야했던 사연도 털어놨다. “남자연예인이 결혼했다고 하면 인기가 떨어지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자로선 굉장히 힘든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윤항기가 건강이 악화됐을 때도 그를 지키고 살려낸 사람은 아내였다. 폐결핵의 전염성 때문에 주위사람들이 윤항기 곁을 떠났지만 그녀는 절망과 분노로 몸부림치는 그의 곁을 지켰다.

병원에도 갈 수 없는 남편을 위해 주사 놓는 법까지 배워가며 윤항기를 간호하고 돌본 지극한 사랑 덕에 살려낼 수 있었다.  이런 내용은 2015년 3월 9일 KBS 1TV ‘그대가 꽃’ 제10화(‘별이 빛나는 밤에’), 2022년 2월 17일 MBN ‘특종세상’(518회) 방송프로그램 등을 통해 알려져 화제가 됐다. 노래 실제주인공인의 감동적인 사랑이야기가 눈길을 끈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엔 딸 둘과 아들(가수 겸 작곡가 윤준호)을 뒀다. 연예계데뷔 64년째를 맞은 윤항기는 15년간 아들부부와 함께 살다 내보내고 아내와 ‘제2의 신혼’ 같은 삶을 누리고 있다. 

‘정든 배’로 가수데뷔…25년간 목사활동

 윤항기는 1943년 9월 15일 충남 보령에서 음악인 아버지(윤부길 1912년 12월 31일~1957년 6월 8일), 악극배우 어머니(성경자, 예명 고향선) 사이에서 2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윤영기), 누나(윤수현), 여동생(윤복희) 사이에 셋째다. 

그는 1959년 서울 용산 미8군 무대에 서면서 음악 삶을 시작했다. 작곡가 김희갑이 단장이었던 악단에서 ‘에이원쇼’를 하며 ‘정든 배’를 발표, 가수로 데뷔했다. 1년 뒤 해병대군악대를 거쳐 1964년 우리나라 최초 록그룹 키보이스를 만들었다.

1974년 솔로가수가 되면서 싱어송라이터로도 유명해졌다. 1970년대 △‘여러분’ △‘장밋빛 스카프’ △‘별이 빛나는 밤에’ △‘이거야 정말’ △‘해변으로 가요’ 등 히트곡들을 남겼다. 여동생인 가수 윤복희의 최대히트곡 ‘여러분’의 작사·작곡가로도 유명하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등 찬양음반도 여럿 냈다. 1975년엔 영화 ‘나는 어떡하라고’에 출연, 연기활동도 잠깐 했다. 화려함 뒤엔 숱한 불행과 고난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경성음악전문학교(서울대 음대 전신) 1회 졸업생으로 성악과 작곡을 전공, 일본에서 공부한 음악인이었다. 우리나라 현대예술사에 한 획을 그은 천재예술가다.

윤항기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노래는커녕 극장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어두웠던 시절 힘든 예술가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타고난 ‘끼’를 어쩔 수 없어 윤항기는 가수가 됐다. 그의 어머니는 악극계스타였다. 천재무용가 최승희 제자로 일본유학 때인 1942년 남편과 결혼, ‘라미라가극단’에서 함께 활동했다.

먹고 잘 곳 없어 고아원생활  윤항기의 어린 시절은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언제부턴가 그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오기 시작했고 마약에도 빠졌다. 게다가 1954년 강원도 묵호에서 낭랑악극단의 주연배우로 출연 중이던 어머니가 무대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가정은 엉망이 됐다. 어린 남매는 서울 청계천 길거리로 내몰렸다. 음식을 주워 먹으며 비참하게 살았다. 어쩔 수 없어 고아원생활을 했다. 그때 그를 이끈 건 음악이었다. 드럼 등 악기연주와 노래 삶을 이어가며 버텨냈다.

연예계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폐결핵(말기)에 걸려 6개월 시한부선고를 받고 죽음직전까지 갔다. 그는 1977년 방송사 연말 가요대전 시상식 때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제1회 서울국제가요제에 나가 대상을 받으며 재기했지만 건강이 문제였다. 고민 끝에 택한 길이 목회자였다. 

연세대 종교음악학과를 졸업한 그는 1986년 음악활동을 멈추고 미국 미드웨스트신학대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아 1990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음악으로 많은 이의 마음을 치유하고 싶어 ‘음악신학원’(현 예음종합예술원)을 열고 교단(현 예장예음)까지 세웠다.

20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총연 총회장에 취임했다. 2020년 10월 제11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인생 3막’ 위해 신곡 내고 다시 가수활동

윤항기는 25년간 목회를 이끈 담임목사직(예음교회)을 내려놓고 인생 3막을 위해 무대로 되돌아왔다. 나이 칠십을 넘긴 2015년의 일이다. 그는 트로트가수 태진아가 대표로 있는 진아기획과 손잡고 신곡 ‘걱정을 말아요’, ‘당신편이야’, ‘반짝반짝’을 내고 열심히 뛰고 있다. 

5살 때부터 아버지가 만든 뮤지컬무대에 오르며 가수가 된 그의 여동생 윤복희 권사(1946년 3월 9일~)는 수년전부터 삼차신경통으로 투병 중이다. 미8군 무대에 서면서 최고스타가 된 그는 루이암스트롱 눈에 띄어 세계 각 나라를 돌며 활동한 첫 한류스타이기도 하다.

왕성상 언론인 / 가수  wss4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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