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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함께 읽는 아름다운 시] 최춘희 '슬픔의 질량은 우리 몸의 고유한 기록이다'
허형만 시인 | 승인 2023.07.28 12:25

 

[여성소비자신문] 물가에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물가에 앉아 하염없이 등만 보이고 앉은 사람 
그 뒤에 서서 
오래도록 그를 바라보던 사람도 있다 

아이들 깔깔, 달려가고 선 캡을 푹 눌러쓴 사람들 팔다리 내저으며 걸어가는 천변 공원, 기역자로 허리 꺾어진 노인 뒤를 반려견이 꼬리 치며 따라가고 있다 붉은머리오목눈이는 흰 조팝나무 갈라진 나뭇가지 사이에 둥지를 짓고, 이제 곧 새끼들이 날개 퍼덕이며 날아오를 것이다 

눈물 많은 이 세상에 온 푸르른 것들이 나는 좋다 길가 깨어진 블록 사이 풀 몇 포기, 피워 낸 잔별들이 너무 좋다 물안개처럼 차오르는 잘 익은 슬픔의 향취가 굶주린 뱃속을 채우고 어느 날 나를 떠나갈 때 내 갈증과 비천함과 측은한 눈빛도 떠갈 날이 금세 오리라

지나가는 모든 이에게 자신의 뒷모습을 아낌없이 내어준 
당신은 누구였을까 

최춘희 시인은 길 위의 시인이다. 시집 한 권 속에 펼쳐진 삶의 길, 시의 길이 때론 서럽고 때론 아름답다.

천변 공원을 걷는 시인의 눈에 보인 “물가에 오래 앉아 있는 사람”, “지나가는 모든 이에게 자신의 뒷모습을 아낌없이 내어 준” 사람을 오래도록 그를 바라보며 그 사람의 몸에서 슬픔의 질량을 읽어내는 시인이 최춘희 시인이다.

시인은 시집 맨 뒤에 해설 대신 ’느리게 걸어가는 지구별 여행, 그리고 시‘라는 제목의 산문을 실었다. 이 글에서 “나는 오늘도 내일도 천천히 여기저기 해찰하며 맛보고 느끼면서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갈 것이다.

길을 걷다 보면 때로 길을 잃기도 하고 어느 순간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미로에 갇혀 같은 자리를 헤매는 낭패의 순간도 있겠지만 겁내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영화 《아이다호》에서 마이크(리버 피닉스)가 자신에게 주문처럼 들려주던 말처럼 이 길은 끝이 없고 지구의 어디라도 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허형만 시인  hhmpoe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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