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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상의 그 노래 그 사연] 6.25전쟁 아픔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전우야 잘 자라'1951년 국방부 정훈국 연예중대 복무하던 유호 작사/박시춘 작곡 가수 현인 취입, 빅히트...1·4후퇴 때 금지곡 됐다가 휴전 후 풀려
왕성상 언론인/가수 | 승인 2023.06.12 08:26

[여성소비자신문]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 자라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고개를 넘어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
한강수야 잘 있더냐 우리는 돌아왔다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주는
노들강변 언덕위에 잠들은 전우야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선 무너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올해는 6·25전쟁 휴전협정(1953년 7월 27일)이 맺어진지 70년이 된다. 이맘때면 전쟁 관련노래들이 떠오른다. 그 가운데서도 ‘전우야 잘 자라’가 많이 생각난다. 전쟁으로 숨진 전우들을 떠올리는 슬픔의 노래다. 4분의 4박자 단조 두 토막의 노래로 4절까지 나간다. 가슴 아픈 내용이지만 행진곡 풍이어서 박진감 있다.

비장하고 애조 띤 곡조에 가슴 찌르는 노랫말

이 노래는 6·25전쟁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졌다. 1951년 국군과 유엔군이 9·28서울수복 뒤 38선을 넘어 북진할 때 태어난 진중가요(陣中歌謠)다. 그때 상황을 알고 노래를 부르다보면 코끝이 찡해진다. 비장하고 애조 띤 곡조에 가슴을 찌르는 듯 한 노랫말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내 등골이 오싹해진다.

노래 1절은 연합군이 승기를 잡은 낙동강전투, 2절은 추풍령, 3절은 한강과 서울수복, 4절은 삼팔선을 향해 나가는 공간적 흐름의 내용이 담겼다. 끝 소절에선 잠든 전우들에게 잘 자라고 위무하며 마친다. 전쟁의 기승전결을 노래로 담아낸 것이다.

전쟁에서 숨진 전우의 모습을 떠올리는 가사가 각 절마다 나와 마음을 사로잡는다. 짧은 음계, 애절한 느낌의 멜로디에 전우의 죽음을 보며 나가는 전투군인들의 비장미 넘치는 노랫말이 가슴을 저민다. 작곡가 박시춘(본명 박순동)이 “좋은 군가는 대포소리에도 지지 않는 예술적 무기”라고 한 말을 그대로 보여준다.

최후방어선인 낙동강전선에서 고군분투하며 숱한 희생을 치른 끝에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 서울을 되찾고 북진하는 과정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가요전문가들은 이 노래를 ‘6·25전쟁을 대표하는 최고진중가요’로 꼽는다. 용맹함과 승리를 다짐하는 다른 군가들과 달리 전쟁에서 어쩔 수 없는 죽음과 마주하는 고통과 슬픔을 겪고 있음을 실감나게 보여줘 의미가 있다.

가수 현인(1919년 12월 14일~2002년 4월 13일, 부산태생)이 불러 히트한 이 곡은 1951년 국방부 정훈국 소속 육군연예중대에서 근무하던 유호(본명 유해준)가 작사하고 같은 중대의 박시춘이 작곡했다. 박시춘은 연예부대 제2중대 책임자였다.

6·25전쟁이 난 뒤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유호는 9월 28일 서울수복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서울 명동에서 우연히 박시춘을 만났다. 전쟁통에서도 살아남은 둘은 반가운 마음에 술집에 갔다. 막걸리를 잔뜩 마신 두 사람은 밤 12시 야간통행금지를 피해 서울 필동 박 씨 집으로 갔다.

그들은 밤새 술을 마시며 “북진통일이 임박했으니 군인들 사기를 북돋울 노래를 만들자”며 술김에 만든 게 ‘전우여 잘 자라’다. 박시춘이 서울로 오는 차 안에서 악상이 떠올라 멜로디 초안을 잡아 둔 게 있어 쉽게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태어난 노래는 삽시간 전국으로 펴져나갔다. 군인, 학생, 남녀노소에 이르기까지 국민애창곡이 됐다. 일명 ‘북진의 노래’로 불리며 북진장병들 주제곡이 됐다. 군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군가처럼 불렸다.

6·25전쟁 초·중반상황을 가사에 담아 현장감 있고 최전방에서 함께 싸우던 전우를 잃은 느낌을 줘 공감이 컸다. 가사 중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와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가 비장하고 인상적이어서 이를 노래제목으로 아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1·4후퇴 때 금지곡이 됐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가 전쟁 중이던 군인들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고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여~’ 대목이 불길하다는 이유에서다. 노래를 만든 유호와 박시춘이 이적행위자로 몰릴 뻔한 촌극도 벌어졌다. 노래는 휴전된 후 금지곡에서 풀렸다.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 주제가로 쓰여

‘전우야 잘 자라’가 히트하기까지엔 에피소드가 많다. 노랫말 중 잘못 전해진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1절 세 번째 소절의 ‘적군’(敵軍)이 그 대목이다. 원래는 ‘적구’(赤狗)였으나 ‘적군’으로 바뀌었다.

‘적구’와 ‘적군’ 발음이 비슷하고 일반적으로 ‘적군’이란 용어에 익숙해 당연히 ‘적군’일거라고 생각해 부른 게 굳어져버렸다. 중대 이하 단위부대별로 장교가 선창하면 병사들이 따라 불렀던 이 노래가 인기곡이 되면서 어느덧 ‘적군’으로 바뀐 것이다.

이 노래는 각종 행사, 기념식, 영화, 드라마, 방송, 게임프로그램에 쓰이거나 불린다. 1963년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 주제가로 유명하다. 영화에선 남성노래그룹 ‘별 넷’이 합창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우리나라 전쟁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 작품이다.

이만희 감독의 남아있는 작품 중 ‘가장 오래된 필름’이다. 전쟁의 참혹함과 비극, 인간의 본성과 갈등을 사실적으로 그린 이 감독 특유의 주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제3회 대종상 감독상(1964년), 제1회 청룡상 감독상(1963년)을 받았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뒤 북진하던 국군해병대의 한 분대가 극한상황을 통해 전쟁의 끔찍함과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본능, 전우애가 실감나게 담겼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땐 광주시민들이 계엄군 공수부대를 상대로 항쟁하면서 불렀던 노래이기도 하다. 1990년대엔 여학생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고무줄놀이를 했다. 2020년 6·25전쟁 70주년 기념행사 때 맨 마지막 국군장병전사자들 유해를 옮기는 의식의 반주곡으로도 쓰였다.

작곡가 박시춘은 경남 밀양에서 부잣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밀양에서 기생을 길러내는 권번(卷番)을 운영했다. 박시춘은 일본유학 때 중학생신분으로 순회공연단을 따라다니며 트럼펫, 바이올린, 색소폰, 기타 연주법을 익혔다.

‘몬테카를로의 갓난이’, ‘어둠 속에 피는 꽃’ 등을 발표하며 1929년 작곡가로 데뷔했다. 1937년 김정구의 첫 취입곡 ‘항구의 선술집’이 호평 받았다. 1937년 말 발표된 남인수(본명 강문수) 빅히트 출세작이자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 작곡자로 유명해졌다. 광복 후엔 1946년 ‘박시춘악단’을 만들어 공연했다. 작사가 유호, 가수 현인과 새 콤비가 돼 발표한 ‘신라의 달밤’ 은 대중가요계 판도를 바꿀 정도로 히트했다.

그는 수많은 군가와 ‘전선야곡’, ‘임 계신 전선’,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명곡들을 작곡했다. ‘비 내리는 고모령’, ‘삼다도 소식’, ‘물새 우는 강 언덕’, ‘돌지 않는 풍차’, ‘봄날은 간다’ 등 인기곡들도 만들었다. 대한레코드작가협회 초대회장(1958년), 연예인협회 이사장(1961~1972년), 음악저작권협회 명예회장(1981년) 등 대중문화계 요직을 거쳤다. 1982년 대중가요창작인으론 처음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다. 그는 당뇨병과 수술불능의 녹내장에 시달리다 1996년 6월 30일  별세했다.

유호, 드라마작가 1호로 최다작 기록

작사가 유호는 광복 후 드라마작가 1호로 최다작 기록의 방송작가이기도 하다. 1921년 11월 15일 황해도 해주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네 살 때 서울로 와 1939년 서울 제2고등보통학교(현재 경복고)를 졸업, 일본으로 유학 갔다.

1943년 귀국해 얻은 첫 직장은 우리나라 최초 연극전용상설극장으로 대중문화중심지였던 동양극장. 매일 연극을 보면서 극본을 썼다. 광복 후엔 미군정이 세운 서울중앙방송(현재 KBS)에서 낭독소설과 라디오연속극 대본을 쓰면서 ‘대한민국 제1호 방송작가’가 됐다.

가요작사는 방송국 경음악단장이던 박시춘 부탁으로 1947년부터 하게 됐다. 자신의 첫 노랫말이자 광복 후 최고히트곡으로 꼽히는 ‘신라의 달밤’을 단숨에 쓴 일화가 있다. ‘비 내리는 고모령’, ‘낭랑18세’, ‘아내의 노래’ 등을 작사했다.

방송계에서 1960~1970년대는 ‘유호 시대’였다. 1961년 개국한 TBC-TV의 주간 기본방송편성표에 ‘유호극장’프로그램이 있었을 정도였다. 특히 TV드라마대본을 쓰기 시작, ‘TBC 일요극장’을 통해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방송국 측이 ‘일요극장’을 작가이름을 딴 ‘유호극장’으로 바꿨을 만큼 유명했다.

그가 만든 영화주제가들도 크게 히트했다. ‘맨발의 청춘’, ‘길 잃은 철새’, ‘맨발로 뛰어라’, ‘남성금지구역’, ‘님은 먼 곳에’ 등 수두룩하다. 군가 ‘맹호부대의 노래’, ‘진짜 사나이’도 그가 빚어낸 곡들이다.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1980년) 등을 거쳤다. 제3회 내성문학상(來成文學賞, 1957년), 제1회 방송문화상(1968년), 제2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2011년)을 받았다.

왕성상 언론인/가수  wss4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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