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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국민애창가요 ‘향수(鄕愁)’옥천출신 정지용 詩가 노랫말...대중가수 이동원-성악가 박인수 불러 히트...가요와 클래식 만남에 물꼬 튼 곡으로 유명...일본 교토에 노래비
왕성상 언론인 / 가수 | 승인 2023.03.13 10:23

[여성소비자신문]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 대중가요와 클래식의 만남에 물꼬 터

정지용 작시(作詩), 김희갑 작곡, 이동원․박인수 노래의 ‘향수(鄕愁)’는 마음이 푸근해지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가요다.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추억이자 그리움의 노래다. 가사에 옛 기억들이 되살아나게 하는 강한 힘이 스며있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공감각적 심상’을 다룰 때면 꼭 인용되는 문구 ‘금빛 게으른 울음’으로도 유명한 곡이다. 

이 노래는 ‘음유시인 가수’로 통하는 이동원이 유명작곡가 김희갑을 찾아가 해금(解禁)된 정지용의 시에 걸맞은 곡을 붙여달라고 해서 태어났다. 1989년 여름 대중가수 이동원이 성악가(테너) 박인수와 듀엣으로 발표해 빅히트했다.

그해 6월 15일 발매된 이동원의 정규음반(‘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대표곡으로 실려 인기를 모은 것이다. 서정적인 노랫말, 아름다운 멜로디로 130만장 이상의 음반이 팔린 국민애창곡이다. 

‘향수’는 대중가요와 클래식 곡의 만남에 물꼬를 튼 노래로도 유명하다. 요즘은 가요와 클래식음악을 접목한 노래가 흔한지만 그때만 해도 드물었다. 보수적이었던 클래식음악과 가요 사이의 벽이 높았던 1980년대 말 우리나라 음악계에선 파격적이었다.

성악가가 가요를 불렀다는 이유로 박인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교수 재임명이 되지 않고 국립오페라단에서도 쫓겨났다. 하지만 ‘향수’는 그의 이름을 대중에 널리 알린 계기가 됐다. 박인수의 클래식발성이 정지용 시인의 아름다운 노랫말을 더 빛내주며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22살 때 일본유학 가기 전에 쓴 시

‘향수’ 노랫말은 1930년대 우리 시단에서 이름 높았던 정 시인이 22살 때인 1923년 일본유학을 가기 전 고향 옥천에 다니러가며 쓴 시다. 발표는 1927년에 됐다. 일제강점기 때로 검정 두루마기를 즐겨 입고 정종(사케)을 좋아했던 그는 술을 한잔하면 ‘향수’와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로 나가는 ‘고향’ 시를 즐겨 읊조렸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를 후렴처럼 노래하며 그곳을 그림 그리듯 보여주는 시의 형식은 음악적 울림은 물론 애틋한 향수의 정감을 실감나게 전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노래를 부른 이동원, 박인수는 이젠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 이동원은 1951년 4월 15일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 보성고(60회)를 졸업했다.

1970년 첫 솔로음반을 낸 그는 1984년 ‘이별의 노래’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로 나가는 ‘가을편지’(고은 시인) 등 감성 짙은 포크송으로 중․장년층으로부터 사랑받았다.

‘이별노래’(정호승 시인), ‘물나라 수국’(김성우 시인), ‘내 사람이여’(백창우 시인) 등 시로 만든 노래를 즐겨 불렀다. 그는 2021년 11월 14일 식도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70세. 유족으론 부인 이명희 씨가 있다. 고인의 임종은 개그맨 전유성 씨가 지켰다.

고인의 투병사실을 알게 된 가수 조영남, 윤형주, 임희숙, 김도향과 방송인 정덕희 씨 등은 그를 위한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가 별세하자 추모행사로 바꿨다.  

박인수도 올 2월 28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눈을 감았다. 향년 85세. 1938년 3남2녀의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운 집안형편 때문에 유년시절부터 신문배달 등을 하며 고학한 끝에 1959년 서울대 음대에 입학했다.

대학 4학년 때인 1962년 성악가로 데뷔, 1967년 국립오페라단이 무대에 올린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주역으로 뽑혔다.

1970년 미국으로 가 줄리아드음악원과 맨해튼음악원 등지에서 공부했다. 그때 전설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의 줄리아드음악원 오디션에도 합격해 화제가 됐다. 이후 그는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라보엠’, ‘토스카’, ‘리골레토’ 등 여러 오페라주역으로 활약했다.

1983년 서울대 성악과 교수가 된 뒤 클래식음악이 특권층 전유물이 아니라며 ‘향수’를 발표, ‘국민테너’로 불렸다. 그는 나라안팎에서 독창회 2천회 이상, 오페라 300회 이상 주역으로 무대에 섰다. 2003년 서울대에서 퇴임, 백석대 석좌교수와 음악대학원장을 맡았다. 부인 안희복 한세대 음대 명예교수, 아들 플루티스트 박상준 씨가 있다.

옥천에 ‘향수’ 시비(詩碑)

정지용 시인은 1902년 5월 15일(음력)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번지에서 정태국․정미하 씨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연못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꿨다고 해서 지룡(池龍)이었다. 이 발음을 따 본명은 지용(芝溶), 세레명은 프란시스코다.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 죽향초등학교)에 들어간 그는 12살 때인 1913년 동갑인 송재숙(1971년 별세)과 결혼했다. 그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 성적은 뛰어났으나 집안이 어려워 교비생(校費生)으로 학교를 다녔다.

그 무렵부터 문재(文才)를 나타내 박팔양 등 8명과 요람동인을 만들어 동인지 ‘요람’을 프린트판으로 10여 호 냈다. 1919년 18세 때 3·1운동이 일어나 무기정학 당하고 수업을 받지 못한 그는 그해 12월 ‘서광’ 창간호에 소설 ‘3인’을 발표했다. 그의 유일한 소설이며 첫 발표작이다. 

1945년 광복과 함께 휘문중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이화여자전문학교(현재 이화여대) 교수로 옮겨 한국어와 라틴어를 강의했다. 6․25전쟁이 나자 정치보위부로 끌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 평양감옥으로 옮겨졌다. 그는 이광수, 계광순 등 33명과 갇혀있다 1950년 폭사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의 월북이유와 그 이후 죽음에 대해 정확히 밝혀진 게 없다.

평양교도소 수감 중 유엔군 폭격으로 숨졌다는 소문과 북으로 가던 중 소요산기슭에서 미군비행기 총탄을 맞고 숨졌다는 설이 있었다. 6·25전쟁 때 북한에서 후퇴하던 중 비행기기관총에 맞아 숨져 함께 갔던 북한수필가가 땅에 묻었다는 설도 있다.

1988년 3월 31일 정지용의 문학작품들이 규제에서 풀려 그해 4월 지용회(초대회장 방용구)가 결성됐다. 5월 15일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제1회 지용제가 열리고 1989년 지용시문학상도 만들어졌다. 2002년 5월 ‘정지용 탄신 100주년 서울지용제 및 지용문학심포지움’이 열렸다. 그해 6월 ‘향수’ 노래비가 일본 교토에 세워졌다. 

정지용 생가 복원…‘향수 30리 길’도 있어

옥천군은 ‘향수’의 고장이다.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에 정 시인이 나고 자란 집이 복원됐고 그의 문학을 들여다볼 수 있는 문학관도 세워졌다. 옥천 어디서나 정 시인을 만날 수 있다. 옥천의 옛 중심지였던 구읍과 보은 쪽 37번 국도변에 자리한 장계관광지를 잇는 ‘향수 30리 길’도 있다.

길거리상점 간판에, 장계관광지 곳곳에 정 시인의 시가 새겨져 있다. ‘향수’ 노래모임도 있다. 옥천재래시장 상인, 주민들이 꾸린 ‘향수합창단’이 그것이다. 정기발표회를 갖고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준다. 옥천장터에선 정 시인을 소재로 한 문화공연과 시극, 다문화가족 전통혼례식, 상인노래자랑, 상인합창단, 저잣거리 문학강좌로 상인들에게 주체의식을 심어주고 지역민에겐 볼거리도 선물한다. 

왕성상 언론인 / 가수  wss4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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