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소비자신문] '해변의 여인'

물위에 떠있는 황혼의 종이배

말없이 거니는 해변의 여인아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황혼 빛에 물 들은 여인의 눈동자

조용히 들려오는 조개들의 옛 이야기

말없이 바라보는 해변의 여인아

시원한 물, 그늘이 그리운 계절이다. ‘코로나 19’로 움츠렸던 사람들이 해변, 강, 섬, 계곡을 찾아 더위를 식히고 있다. 이맘때면 방송전파를 타는 가요가 있다. 나훈아(본명 최홍기) 빅히트곡 ‘해변의 여인’이다. 오래된 가요지만 인기는 신곡 못잖다. 부르기 쉽고 가사가 서정적이다. 노랫말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중·장년들에겐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하고 바닷가나 강변을 찾는 연인들의 분위기를 띄우기에 안성맞춤이다.

4분의 4박자, 슬로우 록풍인 이 곡은 박성규 작사·작곡, 나훈아가 불러 크게 히트했다. 잔잔히 깔리는 멜로디가 바람을 타고 가는 분위기라 여름에 부르면 딱 맞다.

1971년 재발매한 음반 나오자 빅히트

이 노래는 나훈아의 사실상의 데뷔곡이자 히트곡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불리던 1969년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처음엔 빛을 보지 못하고 1971년에야 떴다. ‘지각 히트곡’인 셈이다.

노래가 만들어진 건  나훈아 가수는 무명의 시절 故박성규 작곡가와 마산 가포해수욕장 바다의 집(지금은 없어짐)에서 술을 마시다, 나훈아가 갑자기 “저 여자 혼자 해변을 걷는 걸 보니 고독한 여자 아이가”라고 말하면서 그 유명한 ‘해변의 여인’이 탄생하게 된다.

나훈아(본명:최홍기)는 무명시절 지인들을 만나려고 마산에 자주 왔다. 당시 1973년 4월 하순경 가포해수욕장에는 노을이 지면서 해변에는 잔잔한 파도만 치고 있었다. 그런데 머리를 길게 늘인 여인이 바람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 모래사장을 천천히 걷고 있었고, 그때 누군가 띄워 놓은 종이배가 잔잔한 파도에 밀려 춤을 추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고 박성규 작곡가가 “물에 떠 있는 황혼의 종이배, 말없이 바라보는 해변의 여인아”라고 말하며 몇자를 적자 술을 마시던 나훈아가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황혼빛에 물들은 여인의 눈동자, 조용히 들려오는 조개들의 옛 이야기, 말없이 거니는 해변에 여인아”라고 말해 박성규 작곡가는 즉석에서 앞 소절에 곡을 붙이면서 그 유명한 ‘해변의 여인’이란 노래가 탄생했다.

강석민 (사)한국대중음악인연합회 창원시지회장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시금석을 놓은 ‘해변의 여인’이 창원 마산 가포해수욕장이 창작지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을 못 했다. 마산 가포에 노래비를 세우고 전국적으로 알려 자랑스러운 창원의 문화를 고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나훈아 제의로 노래제목, 가사 수정

악보와 노랫말은 전속가수 나훈아에게 건네졌다. ‘여인’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가요라 바다와 해변에 얽힌 추억의 감흥을 줄 수 있는 ‘해변의 여인’이 제목으로 정해졌다.

그렇게 해서 ‘해변의 여인’ 노래취입이 이뤄져 음반으로 나왔다. 그러나 반응은 별로였다. 박 씨가 쏟은 열정에 비해 대중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한 것이다. 박 씨가 작곡·작사가로서 유명세를 타지 못한데다 나훈아 또한 지금과 같은 톱 가수대열에 끼이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더욱이 노래가 앨범의 맨 아래쪽에 실려 대중의 눈길에서 멀어진 것도 한 원인이었다. 같은 음반에 담긴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히트하는데 들러리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났다. 나훈아는 자신의 전속회사를 오아시스레코드에서 지구레코드로 옮겼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지구레코드사 소속 작곡가 김영광 씨 작품이었던 게 발단이 됐다. 3시간 만에 28곡을 취입했을 정도로 부르는 대로 히트곡을 쏟아냈던 나훈아를 경쟁 레코드사로 빼앗겼다는 건 오아시스레코드로선 큰 손실이었다. ‘가지 마오’, ‘머나먼 고향’ 등이 잇따라 히트하자 오아시스레코드의 조바심은 더했다.

결국 생각해낸 게 맞불작전. 나훈아의 또 다른 노래들을 한꺼번에 내놓아 지구레코드사가 발표하는 신곡의 빛깔을 흐려놓자는 계산에서였다. 방안으로 발표 곡들 중 괜찮은 걸 골라 음반을 새로 포장해내기로 했다. 그때 눈에 띈 게 ‘해변의 여인’. 음반 밑에 깔렸던 노래를 위로 끌어올려 나훈아 음반을 새로 내놨다. 반응은 대박이었다.

노래가 만들어져 발표된 지 몇 년 지나 빛을 본 것이다. 지금의 대형가수 나훈아를 예견하는 듯 신인이었던 그에게 큰 행운을 안겨준 가요가 ‘해변의 여인’이다.

노래가 히트하자 같은 제목의 영화도 나왔다. 2006년 8월 홍상수 감독이 만든 ‘해변의 여인’과 1947년 만들어진 외국영화 ‘해변의 여인(The Woman On The Beach)’(감독 장 르느와르)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영화 ‘해변의 여인’은 로맨스멜로물로 김승우, 고현정, 송선미, 김태우 등이 출연해 눈길을 모았다. 홍 감독의 일곱 번째 작품으로 그의 첫 ‘15세 관람가 영화’다. 외국영화 ‘해변의 여인’엔 로버트 라이언(스콧 역), 조안 베넷(페기 역), 찰스 빅 포드(토드 역), 낸 레슬리(이브 역), 월터 샌드(오토 역) 등이 출연했다.

부산출신 나훈아, 2500여 곡 취입

나훈아는 1947년 2월 11일 부산시 동구 초량2동에서 2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초량초등학교, 대동중학교, 서울 서라벌예술고를 졸업(1965년)했다. 클래식가수를 꿈꾸다 대중가수가 된 그는 고교 1학년 때인 1966년 ‘천리길’을 취입, 가요계에 데뷔했다. 1973년 공군에 입대, 군악대에서 복무했다.

나훈아가 불러 크게 히트한 노래는 120곡이 넘는다. 취입은 2500여 곡, 작사·작곡한 건 800여곡, 발표앨범 수는 200여장, 판매량은 약 2000만장에 이른다. 한때 각종 루머 속에 잠적했다가 다시 활동 중인 나훈아는 지난해 9월 30일 추석연휴 KBS특집방송(‘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에 출연, 큰 화제를 모았다.

그는 여자 복(?)이 많은 편이다. 군 입대직전 영화배우 고은아의 사촌 이숙희씨와 결혼했으나 군 전역 1년을 앞둔 1975년 이혼했다. 1976년엔 7살 많은 영화배우 김지미(1940년생)를 만나 1981년까지 대전에서 살았다. 김지미에겐 영화감독 홍성기, 영화배우 최무룡에 이은 세 번째 결혼이었고 나훈아는 재혼이었다. 둘은 1982년 결별했다. 나훈아는 같이 살면서 김지미의 재산도 관리했지만 이혼 때 재산분할요구 없이 나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어 1985년 후배여가수 정수경(1961년생/본명 정해인)과 결혼, 가정을 꾸렸지만 지금은 갈라섰다. 자녀는 1남1녀.

왕성상 언론인/가수  wss4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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