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 2020.11.25 수 19:13
HOME 오피니언 칼럼
[행복한 시 읽기]문병란 '꽃씨'구명숙의 행복한 시 읽기
구명숙 숙명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0.10.27 11:50

[여성소비자신문]꽃씨

-문병란-

가을날

빈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

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든 가을

빛나는 여름의 오후
핏빛 꽃들의 몸부림이며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비애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 버리면
갑자기 뜰이 넓어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 가는 빛나는 외로움!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창변에
화려한 어젯날의 대화를 묻는다.

가을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황금들판이 그러하고 과수원의 사과, 배, 감나무들, 정원의 모과나무도 온 몸을 낮추고 열매를 내려놓는다. 뻗쳐오르던 여름 무성한 이파리들을 곱게 익힌 가을 산의 그윽한 단풍을 보라.

“가을날/빈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로 시작되는 문병란의 시 ‘꽃씨’를 읽으면, 곡식을 거두고 과일을 따는 결실의 경건함과 뿌듯함이 차오른다.

“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든 가을”을 우러르게 된다. 숱한 잎들과 형형색색 찬란한제 빛깔을 다 모으고 짜내서 알갱이 하나, 그 조그만 씨앗 속에 오롯이 담아 놓는다. 씨앗은 “빛나는 여름의 오후/핏빛 꽃들의 몸부림이며/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꽃을 피우기 위한 몸부림 속에는 우주의 정성과 피나는 노력이 녹아 있다. 열매가 영그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 내면에는 치열한 시간의 핵과 성숙한 충만함이 깃들어 있어 반짝인다. 가을은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고이 여물어 가는 빛나는 외로움!”을 몰고 온다. 충만함의 빈 들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올 한 해 나의 씨앗은 잘 익었는가? 얼마나 가벼운가? 그 무게와 정직을 가늠하며 깊이 성찰하게 된다. 우리는 잘 익어 씨앗이 되고, 씨앗이 다시 푸른 새 생명이 되는 인과에 순응하며, 우리의 가을을 이제 더 이상 놓쳐서는 아니 됨을 깨닫는다. 가을은 하늘도 높고 푸르다. 사람아!


구명숙 숙명여대 명예교수  k9350m@hanmail.net

<저작권자 © 여성소비자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