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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명숙의 행복한 시읽기] 가난한 가을
구명숙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 승인 2019.12.14 16:46

[여성소비자신문] 가난한 가을

-노향림-

가난한 새들은 더 추운 겨울로 가기 위해

새끼들에게 먼저 배고픔을 가르친다.

제 품속에 품고 날마다 물어다 주던 먹이를 끊고

대신 하늘을 나는 연습을 시킨다.

누렇게 풀들이 마른 고수부지엔 지친

새들이 오종종 모여들고 머뭇대는데

어미새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음울한 울음소리만이

높은 빌딩 유리창에 부딪쳐 아찔하게

떨어지는 소리만이 가득하다.

 

행여 무리를 빠져 나온 무녀리들이 방향 없이

빈터에서라도 낙오되어 길 잃을까

드문드문

따뜻한 입김어린 불빛이 켜지기 시작한다.

그 지시등 따라 창밑까지 선회하다가

있는 힘 다해 지상에서 가장 멀리 치솟아 뜬

허공에 무수히 박힌 까만 충치자국 같은 비행체들

캄캄한 하늘을 날며 멀리로 이사 가는

철새들이 보이는 가을날의 연속이다.

시집 ‘푸른 편지’(창비, 2019년)

-시 해설-

곡식들을 거둬들인 쓸쓸한 빈 들녘에 추위가 몰아쳐온다. 새들은 텅 빈 보금자리를 떠나 새로운 터전을 향해 비행을 서두른다.

“가난한 새들은 더 추운 겨울로 가기 위해/새끼들에게 먼저 배고픔을 가르친다.” 그동안 새끼들을 튼실하게 키우고 혹독하게 “하늘을 나는 연습을” 시킨 어미새들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시인의 눈은 섬세하고 그윽하다. “행여 무리를 빠져 나온 무녀리들이 방향 없이/빈터에서라도 낙오되어 길 잃을까” 살펴보며 무녀리들에게 불빛을 비춰 함께 치솟아 날아오르도록 이끌어 준다.

맵찬 바람을 헤치고 두 날개의 힘을 가지런히 모아 방향을 잃지 않는 새들의 자립적 행렬이 아득히 멀어져간다. 새들의 조그만 두 눈은 얼마나 멀리 앞을 내다볼 수 있는 것일까? 선두에 선 리더 격 새들의 꽁지를 따라 묵묵히 날아가는 새떼가 “허공에 무수히 박힌 까만 충치자국 같은 비행체들”로 묘사되어 있다.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기도문처럼 보인다.

가진 것 다 나누어 텅 비운 ‘가난한 가을’이 되었기에 내년 가을을 다시 풍요롭게 채울 수 있는 희망이 남아있는 것이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새들이기에 험난한 비행을 통해 더 높고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며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리라. 누구라도 기죽지 말고 훨훨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참된 자유를 누릴 일이라고. 

구명숙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k9350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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