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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적 정서 담긴 추억의 대중가요 ‘봄비’왕성상의 그 노래 그 사연
왕성상 언론인/가수 | 승인 2021.04.09 11:48

[여성소비자신문] 봄비  

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며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며
나 혼자 쓸쓸히 빗방울소리에 마음을 달래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내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봄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내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봄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라라라라라 라라라 라라라라라
봄비가 내리네 봄비가 내려~~~ 봄비가 내리네 비가 내려
봄비가 내리네 봄비가 내려
아~~아아아아앙~ 아~~아아아아아으아~
와우와 으아아아아으아

1970년 박인수 취입, 대히트…‘한국 최고 소울가수’ 평가
신중현 작사·작곡, 이정화 1969년 첫 발표했으나 눈길 못 끌어

신중현 작사·작곡, 박인수(본명 백병종, 1947년 9월 3일~) 노래 ‘봄비’는 아날로그적 정서가 담긴 추억의 가요다. 4분의 4박자, 슬로우고고리듬으로 봄비가 올 때 부르면 운치 있다. 촉촉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이의 쓸쓸함이 묻어난다. 이슬비, 빗방울소리, 외로운 가슴, 눈물 등의 가사단어들이 분위기를 말해준다. 멜로디도 감성적이다. 내용 또한 시적(詩的)이다.

지금이야 우산이 흔하지만 1960~70년대만 해도 귀했다. 보슬비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맞으며 걷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봄비’ 노랫말에서 그런 전경이 아련하게 그려진다. 긴 가사만큼 멜로디도 길다. 보통 가요의 거의 두 배로 6분 50초간 흐른다.

1967년 미8군 무대에서 ‘열창’

이 노래는 1969년 부산 출신 신 인여가수 이정화가 발표했지만 눈길을 끌지 못했다. 쇼 단원이었던 그녀는 20대 초반 신중현사운드 메인보컬가수로 들어가 노래를 취입했다. 그러다 1970년 박인수가 ‘봄비’를 다시 불러 폭발적 사랑을 받았다. 그 바람에 그는 ‘음악성이 뛰어난 한국 최고 소울(soul)가수’로 평가받았다.

리메이크로는 이 노래 만큼 여러 버전을 가진 곡도 없다. 그때로선 매우 드물게 샤우팅(shouting, 록의 상징적 창법으로 굵고 강하게 내지르는 발성)을 했던 박인수 목소리가 먼저 꼽힌다. 한때 유행했던 ‘김추자 버전’, 한국적 목소리의 1995년 ‘장사익 버전’ 등이 있다. 그만큼 이 노래는 대중에게 잘 잊히지 않는다.

‘봄비’ 작곡 작사가 신중현과 가수 박인수의 인연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어느 날 낮 신중현이 음악연습을 하고 있을 때 훤칠한 키의 박인수가 “자기를 한번 테스트해달라”며 나타났다.

신중현이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소울음악을 하고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박인수는 템프테이션스(The Temptations : 1960년부터 활동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 5인조 그룹)의 ‘My girl(마이 걸)’, 오티스레딩(Otis Redding : 미국가수, 1941년 9월 9일~1967년 12월 10일)의 ‘Duck of the Bay(덕 오브 더 베이)’ 등을 불렀다. 흑인들이 울고 갈 정도로 절창이었다.

박인수

박인수는 그날 밤 미8군 클럽무대에 설 수 있었다. 백인클럽이어서 흑인들은 문에 기대어 노래를 훔쳐들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음에도 몰려들었다. 박인수 몸짓 하나 하나에 박수를 치고 난리였다. 신중현은 박인수를 서울 신촌 연세대 앞 사무실에서 ‘봄비’를 1주일 연습시켰다. 후렴부분에서 무릎을 꿇고 땅을 치며 뽑는 대목에선 공연장이 떠나갈 만큼 인기였다. 박인수가 어릴 적 미군기지촌에서 자라 그곳 무대에서 봤던 모습들을 되살린 것이다. “박인수가 섰던 그 무렵 공연장은 국내 첫 소울무대였다”고 신중현은 자서전을 통해 회고했다.

신중현은 1962년 미국, 영국에서 막 생겼던 락그룹 에드포(Add4)(그때 표기는 ‘에드훠’)를 우리나라 처음 만들었다. 비틀즈, 롤링스톤즈 같은 노래그룹들도 1963년, 1964년에 1집 음반을 냈던 점으로 볼 때 에드포는 세계적 흐름을 봐도 빨랐다. 하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락그룹이 낯설어 음반 몇 장만 낸 채 1966년 깨졌다.

미8군무대로 되돌아간 신중현은 그룹 ‘블루즈 테트(Blooz tet)’를 만들어 활동하던 중 박인수가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해 인연을 맺은 것이다. 소울분위기 노래를 잘 불렀던 박인수는 블루즈 테트의 리드보컬가수가 됐다. 그래서 지금도 ‘봄비’하면 박인수다.

몸이 안 좋아 10년간 가수활동 멈춰

‘봄비’ 노래 에피소드 못잖게 박인수에겐 사연이 많다. 평안도에서 태어난 그의 삶은 부평초 였다. 6·25전쟁 때 남으로 와 떠돌다 춘천초등학교를 2년간 다녔다. 그는 1970년 발표한 ‘봄비’, ‘나팔바지’를 시작으로 1992년 번안곡 ‘해 뜨는 집’까지 11장의 음반을 냈지만 췌장암후유증, 단기기억상실증, 파킨슨병 등으로 음악활동을 쉬었다. 요양시설에 있으면서 10년간 잘 움직이지 못했다. 2002년 동료가수들이 치료비를 돕기 위해 연 자선콘서트에 겨우 나타났다.

그랬던 그가 몇 년 전 싱글음반을 냈다. ‘해 뜨는 집’ 이후 22년 만이다. 2013년 11월 17일 밤 서울 홍대 앞 상수역 베짱이홀에서 펼쳐진 ‘앙코르, 박인수와 친구들’에서 신곡 ‘준비된 만남’ 음원을 공개해 눈길을 모았다. 박인수와 친한 재즈보컬리스트 김준이 만든 곡이다. 박인수가 활동을 본격 재기한 2012년 처음 녹음, 1년 5개월 만에 취입했다. 혼성 4인조 그룹 해리티지, 바리톤 박선기 서울예대 지도교수가 힘을 보탰다.

2014년 1월 미국 뉴욕에선 한인회 초청콘서트무대에도 섰다. 투병 후 첫 라이브공연이었다. 뉴욕은 박인수에게 특별한 곳이자 제2의 삶이 시작된 곳이다. 전쟁고아로 12살 때 미국으로 입양, 뉴욕 할렘가(맨해튼 북쪽의 125st지역)를 맴돌다 솔 음악을 익혔다.

그는 이혼했던 옛 아내(곽복화)와 2012년 봄 40년 만에 재결합, 건강이 회복돼 다시 일어섰다. 가족과 음악 선·후배들 도움으로 재기한 그는 그해 6월 서울 홍대 앞 재즈클럽 문글로우(Moon Glow)에서 ‘박인수와 함께 하는 솔의 만남-어메이징 그레이스’를 통해 복귀신호탄을 올렸다. 몸이 완전치 않아 주위사람 도움을 받아 무대에 서는 토크콘서트 형식이었다.

그러나 건강이 다시 나빠져 필리핀에 있는 메디컬마사지 허봉현 전문의 도움으로 한 달 여 현지에서 물리치료를 받았다. 덕분에 필리핀에서 세부 한인회밴드와 공연까지 했다.

2012년 4월 박인수 사연을 소개한 KBS 1TV ‘인간극장’ 방송 후 그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까지 만들어졌다. 2014년 7월 4일 방송된 KBS 2TV ‘여유만만’에서도 같은 내용이 소개됐다. 투병 중인 박인수와 가족이야기가 담긴 것이다. 아내 곽 씨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얘기를 털어놨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박인수로 인해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며 눈물을 흘렸다. 박인수는 미국입양 후 귀국했으나 정 붙일 곳이 없었던 외로운 신세였다. 두 번의 결혼실패 등 힘든 삶을 이어온 그는 천성적으로 슬픈 영혼을 가진 가수였다.
 
신중현, ‘한국 락의 살아 있는 전설’

‘한국 락의 살아 있는 전설’ 신중현도 얘기가 많은 음악인이다. 1938년 1월 4일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까진 유복하게 자랐지만 6․25전쟁이 터지면서 불행이 시작됐다. 피난 중 아버지 건강이 나빠지면서 집안이 기울었다. 부모와 여동생이 세상을 떠나면서 고아가 됐다. 남동생을 시골친척집에 맡기고 상경한 그는 친척이 하는 상수제약 공장에서 일하며 가장역할을 했다. 힘든 생활 중 유일한 취미이자 탈출구는 기타였다. 그의 노래에 짙게 베인 고독과 외로움이 느껴진다. 불행했던 ‘어린 시절’이 마음에 늘 남아있기 때문일까.

1957년 어느 날 미8군 무대오디션을 본 그는 “내일부터 나오라”는 말을 듣고 기뻐했다. 문제는 “전자기타와 앰프가 있다”고 거짓말을 해버린 것이다. 돈이 없어 기타와 앰프를 사지 못해 헤매던 중 상수제약에서 함께 일했던 벗을 우연히 만났다. 사정을 들은 그 친구가 흔쾌히 기타와 앰프를 사주면서 음악 삶을 꾸릴 수 있게 됐다. 미8군에서 신중현의 인기는 갈수록 높아졌다.

작고 마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연주가 미국 사람들에겐 신기했든지 그는 유명연주인이 돼가고 있었다. 그때 별명은 ‘히키 신’. ‘히키 신-기타멜로디 경음악 선집곡’이란 연주음반까지 내기도 했다.

1960년께 그의 첫 기타독주무대가 서울 용산역 앞 미군정보부 소속의 시빌리안클럽에서 열렸다. 클럽책임자가 신중현에게 Virtues의 Moogie Shuffle이 담긴 음반을 주며 그 곡을  연주해달라고 했다. 시빌리안클럽은 우리나라에 와있는 미군들 중 고위층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부부동반으로 연주를 본 군인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신중현은 “그때가 지금까지의 음악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라고 떠올렸다.

 

왕성상 언론인/가수  wss4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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