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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용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 "문화 예술에 대한 사랑이 6만권 장서 소장가로 이어져"
김경일 기자 | 승인 2020.04.17 16:47

[여성소비자신문 김경일 기자]스타필드 코엑스몰 별마당 도서관은 총 면적 2800㎡에 2개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형 서가 3개에 6만5000권에 달하는 서적은 13m 높이로 코엑스몰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상업시설 중심에 마련된 독서공간은 코엑스 상권을 되살려 놓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2017년 2100만명, 2018년 2400만명이 별마당 도서관을 찾았다.

별마당 도서관은 스타필드 코엑스 방문자를 15%쯤 늘리며 카드 결제 정보 분석 결과 2018년 별마당 도서관을 방문한 외국인은 100만명에 달하며 해외 관광객의 랜드 마크로 만들었다. 이처럼 문화콘텐츠의 위력은 내국인들에게는 핫플레이스로 해외 관광객에게는 랜드 마크가 되어 상권에 힘을 넣어 주기에 충분하다.

1967년 당시 문화공보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여 행정관료로 2003년에 퇴임한 후 현재까지도 문학, 음악, 연극, 영화, 미술, 건축, 사진 문화예술관련 전문서적 약 60000여권 책을 수집한 소문난 장서가 최진용(73세)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를 만나보았다.

고즈넉하고 꽃향기가 가득한 봄날 서울 수유리 골목의 단독주택에 위치한 그의 집은 마치 서점에 온 것처럼 방마다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무 살 때부터 거의 매일 책들을 사 모으기 시작한 게 벌써 50년이 넘게 습관이 되어 책들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행복합니다.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그나마 책을 정리하며 책을 들춰보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답니다.”

방송기자를 꿈꾸던 가난한 학창시절

1947년 인천 동구 화평동 6번지에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황해도 해주출신인 아버지가 김포시에 논과 밭을 장만해 정착하던 6살 때 김포로 거처를 옮기고, 김포 대곶초등학교를 마친 후 인천으로 유학해 동산중과 동산고를 졸업했다.

“학창시절 등록금 조차 낼 형편이 못돼 교무실에 불려가곤 했지만 공부는 그럭저럭 하는 편으로 문학을 좋아해 교지편집위원도 맡았지만, 늘 가난해 소극적으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때도 책을 좋아해 학교도서관 봉사를 자처해 동산중학교 시절엔 ‘에리히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을 읽고 쓴 독후감으로 1등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홍자성의 ‘채근담’이라는 책을 부상으로 받아 막연히 작가나 방송기자를 꿈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어려운 형편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돈을 벌기 위해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막노동꾼에서 공무원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한 후 뚜렷한 꿈도 없이 건설현장 막노동판을 다녔을 시절 우연히 KBS 방송을 보며 잊고 있었던 방송기자의 꿈을 이루고 싶은 마음에 수소문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KBS가 국영방송으로 공보부 산하기관이라 공무원이 되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시험을 준비하여 1967년 6월 ‘5급행정직(현재 9급)’에 합격했습니다.”

그는 이듬해인 1968년 건국대학교 정법대학 행정학과 야간부에 입학해 1학년을 마치고 입대를 하여 약 36개월을 복무한 후 제대를 하고, 1972년에 복직을 하고 이어 복학을 했다.

“그 당시 병역도 미필이고 어리다고 문화부로 발령을 내주었는데 복직을 하고, KBS방송국에서 AD수업을 받으며 방송을 배워가며 꿈을 쫓던 당시 국영 방송이었던 KBS가 공영방송으로 바뀌었고, 공보부도 ‘문화공보부’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결국 방송에 대한 꿈을 포기하였고, 교육부에서 주관해오던 문화재, 문화예술 업무가 문화공보부로 이관되어 당시 정부가 의욕을 갖고 추진 중인 ‘제1차문화예술진흥 5개년 계획’을 입안하는 기획팀에 배치되어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추진했던 이 계획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본격적인 발전 계획을 세우는 일로 1972년부터 마무리되던 1978년까지 무려 7년간 문화예술 정책 수립에 관여하였습니다.”

최진용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 <사진 여성소비자신문 김경일 기자>

제1차문화예술진흥 5개년계획과 대가들과의 인연

“당시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거물들과 자연스럽게 의견을 청취하고 대안을 고민했던 시절로 문학계의 거물인 서정주, 박목월, 김동리, 구상, 황순원, 이은상, 곽종원, 백철들과 무용계의 육완순, 한국무용의 김천흥, 국악에 송방송 선생, 연극의 김정옥, 이근삼, 미술계의 장우성, 유경채, 건축계의 김수근, 영화계의 유현목, 김수용 등 대가들과 거의 매일 회의와 술자리를 함께 하다 보니 그분들과의 대화를 위해서라도 관련책을 미리 읽으며, 본격적으로 문화예술 관련 서적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 분들과의 ‘뒷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1960년대 말부터 현장을 알아야 행정을 제대로 할 것이라는 판단에 각종 공연, 전시마다 쫓아다녔고, 관련 서적을 모으기 시작하며, 70년대부터는 일주일에 공연을 많게는 10여편씩 봤을 정도로 점점 빠져들었다고 한다.

더 나아가 그는 ‘뒷풀이 전무’로 거의 매일 문화예술인들과 밤늦도록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고 인연을 맺고, 예술현장의 고충을 온몸으로 느끼며 일했다고 한다.

젊었기에 힘든 줄도 모르고 만났던 인연과 정책실현

10.26과 12.12로 전두환 정권으로 바뀌면서 ‘제2차 문예진흥 5개년계획’이 중단되고 1980년 ‘새문화정책’이 실행되며 예술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며, 미술, 영화분과를 담당하는 팀장(사무관)으로 승진을 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고, ‘인권침해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총리실 산하 ‘인권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여 정부와 시민단체 모두에 신뢰받을 문화계 인사 몫으로 구상 선생이 추천되었는데, 당시 관련 장관까지 나서서 설득해도 고사를 하던 중, 문화공보부 차관이 불러 갔더니 구상 선생을 설득하라는 특명을 내릴 만큼 관련 부처에는 저와 구상 선생의 친분이 소문나 있었습니다. 그만큼 당시 많은 예술가분들과 교류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만난 예술분야 문인, 미술가, 영화인, 연극인 등 인연을 맺고 있는 분들은 아마 지금까지 6000명 정도 될 듯합니다.

1990년에는 예술원 진흥과장(서기관)으로 진급하여 이어령 선생이 초대장관으로 부임했을 때 이어령 장관은 역점사업으로 어문과를 신설하였습니다. 당시 어문과장으로 발령받아 일을 하게 되어 ‘국립국어연구원’을 설립하고, ‘외래어표기위원회’를 만드는데 매진을 하였습니다. 영화진흥 과장시절에는 영화시장 전면개방으로 영화인들과 머리를 맞대고 지원방안을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경험을 모아서 ‘한국영화 정책흐름과 전망’이라는 책도 집필을 했습니다.”

9급공무원으로 시작해 국장으로 명예퇴직 하기까지

“술값은 언제나 내가 낸다”라는 원칙으로 사람들과 만남을 이어갔고, 당시 자가용도 없이 재산목록 1호가 모아온 많은 공연 팜플렛과 약 60000권의 책이라고 한다.

언제나 주변에 사람이 넘쳐나 현재도 가장 많이 드는 경비가 경조사비로 지출되지만, 이 또한 주변에 사람들이 있어 늘 행복하다고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무 과장 시절 ‘과천미술관’을 지으며 맨 먼저 경리팀장을 교체하며 ‘수백억 국민세금이 들어간 공사를 단 1건의 감사원 지적도 받지 않고 완공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는 전통예술과 초대과장, 출판과장을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전시과장 그리고 1997년 문화부 감사과장 후 국장(부이사관)으로 승진했다.

“1999년 국립극장극장장으로 취임할 당시는 힘들었던 시절로 기억에 남습니다. IMF 경제위기로 직원 50% 감축과 국립합창단 해체 등 지침을 받고 고심을 하였습니다. 국립극장 안에는 국립오페라단, 국립합창단, 국립발레단 등 전속단체와 상주단체, 예술진흥회, 아르바이트 학생까지 900여명이었는데, 만약 그때 국립합창단을 없앤다면 각 지방의 합창단이 모두 없어져야 했습니다.
그 당시 ‘함께 가는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결국 국립합창단, 국립발레단, 국립오페라 등은 법인화해 예술의 전당으로 이관시키는 것으로 살리고, 국립극장은 슬림화 한 후, 체질강화 대책으로 마무리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는 2002년에는 월드컵 조직위원회 기획조정국장을 맡아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국립현대미술관 사무국장, 2003년 대한민국예술원 사무국장(이사관)을 끝으로 54세 젊은 나이에 명예퇴직을 하여, 현재 9급공무원으로 시작하여 국장급으로 오른 문화예술분야 공무원의 전설이 되었다.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1991년 당시 예술인들이 연극 팜플렛과 전단지 등을 인쇄할 자금이 없는 가난한 극단, 무용단, 화가 등을 지원해 달라고 삼성출판사 김종규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두 말 않고 도와주셨던 일이 기억에 납니다. ‘한국 문화계의 마당발’이자 ‘문화계의 대부’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분으로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했던 분으로 기억이 납니다.

이어령 장관이 퇴임 직전 정부의 KS인 한글완성형 코드는 99.9%는 맞지만 없는 글자가 있어 한글 KS를 100% 조합형코드로 바꾸려니 예산이 2조원이 들어가는 해결책을 물어왔을 때 전 이상희 과학기술부장관을 찾아 뵈어 ‘완성형 조합형 복수지원’ 컴퓨터 선택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베를린, 칸느, 모스크바 등 국제영화제 한국대표단으로 참가한 것과 개인적으로 참가한 것이 잊을 수 없는 일이고, 해외 40여개국 1200여개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관람하며 여행을 다녔던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수집한 60000권 도서로 문화예술 전문 도서박물관 설립이 꿈 “작가로서의 삶도 이어가고 싶어”

그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사무처장, 노원문화예술회관 관장, 의정부예술의전당 대표를 거처 2016년 인천문화재단 대표로 2년간 근무했다.

우리나라 문화예술행정 분야의 전문가이자 원로로 공직생활 중 ‘한국영화정책의 흐름과 발전방향’(공저, 집문당 1993년) 등 책을 펴냈고, 지방문화육성방안(1980년), 공연예술의 해외수출방안(2001년), 기술의 발전과 예술영역의 확장(2013년) 등 많은 논문을 발표하며, 대학에서 10년 이상 강의를 했다.

“앞으로의 삶은 그동안 수집했던 책들을 기증하여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며, 책을 집필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문화경제학, 문화정책, 예술경영, 예술기행, 왜 나는 바보처럼 책에 갇혀 사는가?라는 제목으로 5권의 책을 집필하고 있습니다. 또 그동안 모아 놓았던 약 60000여권의 책을 기증하여 복합문화공간에 문화예술전문 도서 박물관 설립을 추진 중입니다.”

약 60000여권의 책이라는 숫자가 얼핏 받아들여지지 않겠지만, 풀어보자면 100살을 사는 한 사람이 하루에 약 두 권의 책을 모아야 하는 분량이다.

공연과 사람이 좋아 전원생활을 못한다

이미 1983년에 ‘장서 소장가’로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기념패를 받으며, 책 매니아로 소문나 있는 그는 교보문고의 VVIP이다.

책도 좋아하지만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에서 사람 만나는 것을 더 좋아하는 그는 늘 주변에 사람이 많이 있다. 사람을 좋아하니 술도 좋아하고, 공연관람을 지금도 매주 3~5회를 다니기 때문에 서울을 떠날 수 없다고 한다.

공무원 시절 남에게 절대 술 얻어먹지 말라고 유산 대신 술값을 주었던 장인의 배려와 아내의 내조가 있었기에 책을 수집하며 수많은 예술가들과 소통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한다.

유럽을 100번도 넘게 다녔고, 갈 때 마다 하루 3만보 넘게 걸어 다니며, 예술가들의 흔적을 찾아다니다 보니 셰익스피어, 단테, 레오나르도다빈치, 괴테, 빅토르위고 등이 살았던 발자취를 찾아다니는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들의 발자취를 집중적으로 파고 다니다 보니 그 작가들의 책도 구입하여 보게 되고, 일반 서점에 없는 책들을 소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예술가 별로 기획전을 할 만큼 책이 준비되어 있어, 앞으로 실행에 옮기려 하며, 무엇보다도 지자체에 기증을 하여 이를 공부하고 싶어하는 후손들에게 책이 사용되길 바란다고 한다.

25년간 살았던 명륜동 집에서 수유리로 이사한 이유도 조용한 곳에서 집필을 하며, 그간 수집했던 책을 정리하기 위함이고, 집에서 독서모임을 하기 위해 넓은 집으로 이사를 왔다.

어렵게 평생을 모아온 책들이 단순히 도서관처럼 운영되는 것보다 공연도 하고, 세미나도 열리는 공간에 있기를 바랬다. 이는 마치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이 핫플레이스와 랜드마크로 사람들이 찾는 것처럼 바라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를 보며 문화예술행정 전문가로 모아 놓은 책은 일반 도서가 아니라 예술하는 사람이 꼭 가야할 박물관의 보물처럼 활용되는 그날이 기다려졌다.

 

김경일 기자  imagemod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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