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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상의 그 노래 그 사연]박인희의 ‘봄이 오는 길’봄소식에 설레는 마음 그려낸 가요 ‘봄이 오는 길’ 김기웅 작사·작곡, 박인희 노래…1974년 2월 발표해 크게 히트, 아름다운 가사, 부드러운 멜로디 인기…35년 만에 가요계 컴백 화제
왕성상 언론인/가수 | 승인 2020.03.10 14:14

[여성소비자신문]박인희 ‘봄이 오는 길’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온다네
들 너머 뽀얀 논밭에도 온다네
아지랑이 속삭이네 봄이 찾아온다고
어차피 찾아오실 고운 손님이기에
곱게 단장하고 웃으며 반기려네
하얀 새 옷 입고 분홍신 갈아 신고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온다네
들 너머 뽀얀 논밭에도 온다네
곱게 단장하고 웃으며 반기려네
하얀 새 옷 입고 분홍신 갈아신고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온다네
들 너머 뽀얀 논밭에도 온다네
들 너머 뽀얀 논밭에도 온다네

봄이다. 산과 들에 새싹이 돋고 꽃들이 얼굴을 내민다. 이맘때면 누구나 한 번쯤 봄 소재 노래를 흥얼거리곤 한다. 김기웅(金基雄) 작사·작곡, 박인희(朴麟姬) 노래의 ‘봄이 오는 길’이 대표적이다. 요즘 같은 생동의 계절에 어울리는 곡이다.

1974년 2월 발표된 ‘봄이 오는 길’은 봄소식에 설레는 마음을 잘 그려냈다. 박인희가 솔로가수가 된 뒤 낸 두 번째 음반수록곡이다. 4분의 4박자로 노랫말이 아름답다. 순수한 우리 토박이말들이 정겹다.

부드러운 멜로디에 청아한 박인희의 목소리가 버물어진 한편의 시를 읊조리는 느낌이다. 긴 머리에 청바지,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 인기를 끈 ‘노래하는 시인’ 박인희는 노래, 연주, 작사, 작곡, 시작(詩作), 방송진행까지 예능분야 소질을 타고났다. 차분하고 우수어린 목소리는 지적인 풍모까지 묻어난다. 그래서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팬클럽이 만들어져 모임을 갖고 있다.

숙대 불문과 출신 박인희, 1969년 음악 삶 시작

박인희

박인희(1945년생)의 음악 삶은 숙명여대 불문학과에 다니던 1969년부터 시작된다. 서울 ‘미도파살롱’에서 사회자(MC)로 활동할 때 밴드 ‘타이거즈’ 리더인 이필원을 만나 1970년 3월 남녀혼성 노래그룹(포크듀엣) ‘뚜아 에 무아’(toi et moi, 프랑스말로 ‘너와 나’란 뜻)를 국내 처음 만들면서다.

포크듀엣은 서울 명동에서 음악다방DJ를 했던 박인희와 그곳에서 노래를 부르던 이필원이 만나 결성된 것이다. 이필원의 고독과 애수에 젖은 목소리, 박인희의 지적이며 정숙한 목소리가 대중을 사로잡았다. 둘은 ‘약속’을 불러 천상의 화음이란 찬사를 받았다. 음반이 불티나게 팔리며 인기그룹으로 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완벽한 조화가 연인사이란 오해를 불러 2년을 넘기지 못하고 1971년 11월 팀 해체란 아픔을 겪었다. 이필원은 1964년 결혼한 상태로 데뷔 때 기혼자임을 밝히며 “박인희와는 먼 친척 사이”라고 연막을 쳤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연인처럼 보였다. 부르는 노래마다 연인 간의 사랑을 속삭이는 것들이라 팬들의 로망에 불을 지필만 했다.

팀 해체 후 이필원은 잠시 솔로가수로 활동하다 1973년 10월 한인경을 맞아 ‘뚜아 에 무아 2기’(1974년 8월 해체)를 꾸렸다. 박인희는 1973년부터 솔로가수가 됐다.

‘봄이 오는 길’은 그가 솔로가수가 된 뒤 발표한 것이다. 1972년 결혼한 그는 1974~76년 6개의 음반을 냈다. ‘모닥불’, ‘끝이 없는 길’, ‘세월이 가면’, ‘봄이 오는 길’ 등 발표곡마다 히트했다. ‘약속’, ‘한 사람’, ‘목마와 숙녀’, ‘그리운 사람끼리’, ‘방랑자’도 큰 인기였다.

그렇게 잘 나가던 기간은 길지 않았다. 1979년까지 음반을 내며 전성기를 누리다 1981년 무대 활동을 접었다. 어느 날 갑자기 가요계를 떠나자 사망설까지 나돌기도 했다. 함초롬한 이미지에 생머리를 곱게 묶은 그는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것이다.

미국에선 한인방송국 제작국장 겸 진행자

미국으로 떠난 박인희는 로스앤젤레스(LA) 미주한인방송국(KCB) 제작국장 겸 라디오프로그램진행자로 일했다. 1994년엔 KBS 2FM 라디오 ‘박인희의 음악앨범’ DJ로 활동하기도 했다. 미국에선 3권의 책도 냈다. 수필집 ‘우리 둘이는’은 풍문여중 동창인 이해인 수녀와 주고받은 편지들로 꾸며졌다.

그러던 그가 2016년 봄 35년 만에 가요계로 돌아와 화제였다. 2016년 4월 29일~30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홀에서 난생 첫 콘서트를 열어 팬들 궁금증을 풀어주고 건재함도 보여줬다. 행사에선 자신의 히트곡 ‘하얀 조가비’, ‘겨울 바다’, ‘추억 속의 스카브로’ 등 12곡을 들려줬다.

자작시 ‘얼굴’,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권대웅의 ‘달 포장마차’ 등 애송시도 읊조렸다. 히트곡 ‘모닥불’의 하모니카선율이 울려 퍼지며 무대에 오른 그는 대학시절 시화전에 냈던 자작시 ‘얼굴’을 낭송하며 공연시작을 알려 이채로웠다.

그해 9월엔 ‘박인희와 송창식의 앙코르무대’가 세종문화회관에서 펼쳐져 추억의 선율을 안겨줬다. 지방 팬들을 위한 전국노래투어도 가졌다. 음색엔 군더더기가 없고 세월의 기품이 서려있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박인희는 김상희(가수), 반효정(탤런트) 등 유명인들이 많이 나온 서울 풍문여고를 졸업했다. 시인 이해인 수녀와는 풍문여중 동창, 삼둥이할머니 김을동(탤런트, 전 국회의원)과는 풍문여고 동기다. 박인희는 원래 연극배우가 되고 싶어 했다. 대학 4학년 때 실험극장의 주연배우모집 때 수석합격 했을 만큼 재능이 있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꿈을 접었다. 숙대 재학 땐 방송반 부장을 해 DJ쪽에 흥미를 가졌다.

김기웅, ‘국가대표 복싱선수출신 작곡가’

 ‘봄이 오는 길’을 작사․작곡한 김기웅씨 삶도 특이하다. ‘국가대표 복싱선수출신 작곡가’ 겸 가수, 연주인이다. 1936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나 송도중학교 2학년 때인 1․4후퇴 무렵 가족들과 헤어져 혼자 월남, 독학으로 일어선 자수성가형 음악인이다.

1958년 미8군 쇼단 ‘Make in Whoopy Show’에서 기타리스트로 음악계에 첫발을 디딘 뒤 작곡가로 변신했다. ‘비둘기집’, ‘저녁 한때 목장풍경’, ‘저 꽃 속의 찬란한 빛이’ 등 주옥같은 노래를 만들었다.

1978년 KBS악단장, KBS합창단장을 맡으며 드라마, 영화음악에도 몰두해 작곡영역을 넓혔다. 월남 후 인천에서 자리 잡은 그는 복싱명문학교 서울 성북고에 진학, 3학년 때부터 권투를 했다. 웰터급 고교챔피언에까지 오르면서 신흥대(현 경희대 체대) 특기생으로 뽑혔다.

1956년 공군입대 후 공군대표 복싱선수로 출전, 시합 중 반나절 동안 의식을 잃었을 정도로 다쳤지만 제대 후 복학해 다시 링에 섰다. 그러나 1960년 로마올림픽출전 국가대표 최종선발전에서 떨어지는 불운을 맛봐야했다.

좌절의 나날을 보내던 중 고향선배인 트럼펫터 왕성배 씨를 만나 음악의 길을 걸었다. 미8군쇼단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1962년 4월 최고실력자들이 모인 워커힐악단 전속단원으로 뽑혀 악단연주곡과 노래반주 편곡까지 도맡았다.

그는 경희대 음대 작곡과 2학년에 편입, 본격적인 작곡공부를 해 국내․외가요제에서 여러 상을 받았다. 우리들 삶은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 했던가. 담도암, 폐렴합병증으로 2013년 11월 11일 77세의 일기로 삶을 마쳤다. 한국영화음악작곡가협회 고문, 소망교회 장로 겸 음악부장을 맡았던 고인은 자신의 삶을 증명이라도 하듯 만년까지 창작에 힘썼다.

필자 왕성상은 마산중·고,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신문방송대학원을 나와 1979년 한국경제신문 기자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몸담고 있다. 특히 ‘남인수가요제’ 우수상을 받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 등록(865호), ‘이별 없는 마산항’ 등을 취입했다. ‘기자가수’로 노래관련 강의와 무대에 서면서 글을 쓰고 있다. 20년 가까이 전국을 다니며 노래봉사에 열심이다.

왕성상 언론인/가수  wss4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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