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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4세 박중원 검거…형제의 난이 야기한 뒤집어진 인생
홍원호 기자 | 승인 2013.04.03 13:48

 

   
박중원 씨

[여성소비자신문=홍원호기자] 마피아의 계율 중 가장 유명한 말은 오메르타, 즉 침묵의 계율이다. 침묵의 계율에 따라 조직 내의 일은 오직 조직 내부에서 해결(코사 노스트라)해야 하며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외부에는 알리지 않는다. 이를 어긴 자는 벤데타, 조직의 철저한 복수를 받는다.

정도의 강약은 있지만 오메르타-코사 노스트라-벤데타로 이어지는 일련의 계율은 어린아이들의 또래집단부터 거대한 기업·정부에까지 적용되는 불문율이다. 이 암묵적인 철칙은 내집단의 자기결속력을 다지고 외집단에 대한 저항력을 다진다.

자신들만의 성역을 구축하고 외부와는 어떠한 접촉도 배제하는 재벌가들은 이 은밀한 철칙의 신봉자들이다. 직계혈연들은 뜻이 맞을 때는 외부에 철옹성처럼 반응하지만 뜻이 맞지 않을 때는 같은 하늘 아래 설 수 없는 원수처럼 싸우다 갈라선다.

두산의 고 박두병 초대 명예회장은 재벌 중에서도 유달리 결속을 강조하던 인물이었다. 통상의 재벌들이 자녀 중 한 명에게 단일승계를 하거나 계열사별로 분할 승계를 하는 것과 달리 고 박두병 명예회장은 6명의 아들에게 두산을 공동소유, 공동경영하게 했다.

선친의 사후, 유훈에 따라 두산 가의 아들들은 ‘공동소유, 공동경영’의 원칙에 따라 장남 박용곤 회장이 첫 키를 잡았다. 당시 두산그룹은 양조, 식품회사로 OB맥주를 중심으로 맥주제조에 필요한 기계공업 계열사를 두고 있었는데, 1981년부터 장남 박용곤 씨의 지휘 하에 건설업 및 전자 등 경공업산업으로 서서히 사업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런데 두산 가의 아들들 사이에서 미세한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장남 박용곤 씨가 경영권을 잡은 지 10년이 넘어가도록 경영권을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합의에 의한 것이긴 했지만 2남 박용오 씨가 내심 품어온 불만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1991년 박용곤 씨의 경영가도에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지게 됐다. 두산전자 구미공장이 페놀원액 30여톤을 낙동강 식수원지에 무당 방출한 ‘낙동강 페놀 오염사고’가 그것이다. 낙동강 페놀 오염사고는 사회 전반에 여파를 끼쳐 당시 허남훈 환경처 장관이 경질시켰고 전 국민적으로 두산제품 불매운동을 야기했다.

박용곤 씨는 대국민 사과와 더불어 자리를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993년 박용곤 씨가 다시 경영의 키를 잡고 환경방제에 힘을 기울여 1996년부터 정부로부터 모범환경기업 선정을 받게 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외환위기가 닥치기 1년 전인 1995년, 두산그룹은 경상수지 적자로 인한 경제위축과 경영오판으로 심각한 수익성 악화를 겪고 있었고 결국 주력부문인 음료사업을 코카콜라에 넘기고 부동산 등 자산을 매각해야 했다.

1996년 2남 고 박용오 씨가 고대하던 두산 경영의 핵심에 올라섰지만 기뻐할 틈도 없었다. 안정적인 회사를 이어 받은 형과 달리 고 박용오 씨는 때마침 터진 외환위기로 100년여 역사를 자랑하던 두산그룹을 절명의 위기에서 회생으로 뒤바꾸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안게 됐다. 사상 최대의 기업부도사태에서 살아남으려면 극약 처방이 필요했다.

오늘날 두산그룹은 음료나 맥주가 아니라 국내 중공업 및 중장비 기계공업의 메카 중 하나로 꼽힌다. 2남 고 박용오 씨는 과감한 인수합병으로 식음료, 경공업, 생활문화 등 전형적인 내수기업인 두산을 중공업을 바탕으로 한 수출기업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2001년 한국중공업, 2005년 대우정밀공업의 인수는 창업 이래 두산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었다. 두산은 순식간에 재계서열 10위의 대기업으로 거듭났다. 2남 고 박용오 씨는 두산을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한 구원자이자 오늘날 두산을 이루는 제 2의 창업자였던 셈이다.

너무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이었을까. 2005년 7월 박용곤 명예회장을 필두로 두산 가는 ‘공동소유, 공동경영’이라는 선대의 유훈에 따라 고 박용오 씨에게 회장직을 3남 박용성 씨에게 물려 줄 것을 요구했다.

만일 고 박용오 씨가 유훈에 따라 3남 박용성 씨에게 내줬다면 사단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침묵의 계율과 코사노스트라를 어기고 형제들의 비리를 검찰에 고발하기 시작했다.

비자금, 분식회계, 횡령, 배임… 국내 재벌사에서 단골로 나오는 단어들이 두산 3세 형제간 소송 전에서 오르락 내렸다. 폭로전은 단순한 수단에 불과했다. 비리로 형제들을 실추하고 자신의 업적을 내세워 일반 주주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려는 것이 고 박용오 씨의 속셈이었다.

3남 박용성 씨와 5남 박용만 씨(현 두산 회장)에 각각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이 선고됐지만 고 박용오 씨는 주주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했다. 그는 기어이 가족에서 퇴출됐고 2008년 성지건설을 인수해 재기를 기약했다. 국제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몰아치던 그 때 부동산 시장은 최악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고 박용오 회장은 외환위기는 극복할 수 있었지만 국제금융위기는 극복할 수 없었다. 애초에 도급 순위 55위인 성지건설과 정재계 탄탄한 인맥을 활용할 수 있었던 두산그룹은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다. 두산그룹과 두산 가는 벤데타, 복수의 원칙에 따라 2남의 위기에도 절대로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한편 고 박용오 씨의 차남 박중원 씨는 2007년 뉴월코프란 코스닥 상장사 대표에서 2008년 4월 성지건설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같은 해 7월 법원의 구속영장을 받아야 했다. 

아버지와 함께 두산가에서 쫓겨난 그가 그저 정직한 경영인으로 삶을 살았다면 어쩌면 후술할 비극도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2007년 뉴월코프를 자본없이 인수하고도 자기자본으로 인수한 것처럼 공시해 주가를 올려 부당이득을 취한 혐의(증권거래법 위반)로 구속 기소됐다.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고, 2009년 말엽 항소심을 진행하던 중 이었다.

차남의 구속은 고 박용오 씨에게 큰 타격과 상심을 안겨 주었다. 성지건설를 통한 재기도 실패했다. 그는 홀로 가슴앓이를 하다가 2009년 11월 4일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중원 씨는 사방에서 몰려오는 빚에 전전긍긍하며 잠적하는 생활을 하다 2012년 3월 온라인 쇼핑몰 운영자 홍모씨로부터 1억5000만원을 빌렸다 갚지 않아 시기혐의로 고소당했다. 지난해 11월 구속영장 청구 후 그는 잠적생활에 들어갔고 검찰은 전국에 지명수배령을 내렸다.

그는 4개월간 의 도주생활 끝에 3월 21일 경찰에 검거됐다.
 

홍원호 기자  hongfir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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