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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자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원장 “소명의식과 주인의식 갖고 법률 구조의 길 걸어와""어린이와 여성, 약자 돕기 위해 힘써”
한지안 기자 | 승인 2019.12.12 15:42
사진=여성소비자신문

[여성소비자신문 한지안 기자] 본부와 지부를 통해 약 33만 건의 무료 법률상담 및 조정화해, 대서, 소송구조를 해오고 있는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의 양정자 원장은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이태영 박사의 제자이자 상담원을 통해 ‘동역자’로써 그의 유산을 계승한 인물이다. 1995년도 한국 최초로 법률구조에 관한 연구를 통해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어린이와 여성, 약자를 돕겠다”는 비전을 갖고 일평생 법률 구조에 힘썼다. <여성소비자신문>이 양정자 원장을 만나봤다.

“이태영 박사와 ‘동역자’로 일한 33년...소명의식이 가장 중요해”

그는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이 생겨난 배경에 대해 설명하며 말문을 열었다. 양 원장은 이화여자대학교 재학 당시 이태영 박사와 처음 만나 동역자의 길을 걷게 됐다고 설명했다.

“여의도에 있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신 이태영 박사님이 세우셨다. 상담소가 세워지기 이전에 이 박사님은 이화여대 학장을 맡으셨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사법고시를 통과해야만 법원이나 변호사 사무실 등에서 시보를 할 수 있었다. 이 박사님은 미국에 시찰차 가셨다가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을 방문해 학생들이 임상실습을 위해 무료 변론을 맡고 있는 것을 보시고 실습수업을 개설하셨다. 그 수업을 들으면서 이 박사님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한국 학생들이 실제 고객과의 실습 없이 사례연구만을 하고 있던 시절, 이태영 박사는 이화여대 학장으로 부임하며 4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족법 관련 ‘가정법률상담실습’ 과목을 개설했다. 그가 이 박사와 함께 일하게 된 건 이 실습을 통해서였다.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어느 날 이 박사님께서 나에게 ‘동역자로 일하자’고 권하셨다. 그때는 ‘왜 직원이라 하지 않고 동역자라고 말씀하실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가족들과 의논하고 그곳에서 일하기로 결정한 이후 33년을 일하며 알게 됐다.”

양 원장은 이 박사와 함께 일하기로 결심한 이후 무료상담 업무와 함께 아동이나 여성 등 소외 계층을 위한 지부를 세우는 일을 맡았다. 상담소가 약자들을 돕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도 서울에만 위치해 있었던 탓에 변호사 사무실 등의 법률 서비스 기관이 적은 지방에서 상담자가 찾아오더라도 도움을 받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당시 상담이 선착순으로 진행됐던 만큼 지방 거주민들의 불편함은 더욱 컸다.

“1999년 퇴직해서 나오기까지 이태영 박사님과 함께 국내에 27개, 미국에 12개 지부를 만들었다. 특히 법률서비스를 필요로 하면서도 서로를 믿지 못하던 LA 교민사회에 가장 필요했기 때문에 제가 거기에 1년을 머무르며 자리를 잡아주고 돌아왔다. 이후에 이태영 박사님은 치매가 오셔서 은퇴하시고, 그분의 사위가 가정법률상담소를 물려받아 맡았다.”

상담소는 양성평등·인권보호에 대한 비전을 위해 운영됐다. 상담료가 없는 만큼 어디선가 후원금을 받지 못하면 수익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여타 여성단체나 여성 근로자들이 입은 피해를 도우면서도 정작 내부적으로는 복무규정 및 회계규정이 없었다. 업무량도 일정치 않았으며 국가 등으로부터의 지원도 전혀 없었다. 양 원장은 이에 대해 “우리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했고, 따라서 아무 불만이나 문제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태영 박사의 은퇴이후 문제가 생겼다.

당시 이태영 박사는 양 원장에게 ‘새로 부임하는 원장을 잘 보필하라’는 뜻을 남겼다. 이후 상담소를 맡게 된 이는 이태영 박사의 사위로, 양 원장에 따르면 “외국 유학 후 법조계에서 40년 이상 일하며 굉장히 성공적인 커리어를 일군 변호사”였다.

“그는 예를 들자면 사장과 여성근로자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사장을 변호하는 사람이었다. 반면 우리는 여성근로자를 변호하는 이들이었다. 그 분이 대표를 맡으면서 수익문제 뿐 아니라 여러 문제가 생겼다. 가정법률상담소는 가정폭력에 대한 처벌 제도가 없던 시절에 가정에서 폭력에 시달리거나 다른 피해를 입는 여성들을 만나 상담을 해주는 한편 관련 법 제정을 시도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전문성 있게 법을 아는 인물이 필요했다. 그런데 신임 소장은 피해자들에게 ‘그러면 남편을 고소하려는 거냐’고 묻는 등 가정 폭력을 처벌하는 법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호주제 폐지는 더더욱 싫어했다.”

양 원장은 “그런 일을 이태영 박사님이 하실 때 사위로써 옆에서 도울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가 대표가 되고 나니 대학 졸업 후 33년 동안 수익 없이 이 박사님의 뜻을 따라 이 일을 해온 나로서는 그분이 나를 해고한다고 하더라도 한마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대화 과정에서 기존에 없던 복무규정이 생겨 55세에 정년퇴직을 하게 됐다.

“가정법률상담소는 돈이 있어서 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박사님도 사비와 시간을 들여서 일생을 10원 한 장 받지 않고 일하셨다. 그래서 우리 직원들도 월급이 많다 적다를 논할 수가 없었고, 이 사회의 정의를 위해 동역자로 일했다. 들어온 수익을 나눠 가지는 것은 동업자고, 나는 동역자였다.” 1999년 3월 31일 그가 법에 의해 퇴직 한 후, 지부에서 일할 당시 만난 후원자들이 건물과 운영비 등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그렇게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이 그 해 8월 26일 목동 홍익병원 별관 5층에서 출범했다.

양 원장에 따르면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은 환자를 치료하고 수술하는 병원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이왕이면 수술 없이 낫는 편이 좋지 않나”라고 그는 설명한다.

“상담원에서는 무료 상담을 제공하는 한편 소송까지 가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조정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고자 한다. 또 사람들로 하여금 내 권리를 침해당하지도 않고 남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매주 수요일 마다 법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가정폭력이나 성폭력과 관련된 상담직 종사자들을 대상으로도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들을 교육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직업의식’과 ‘소명의식’이다. 직업을 생각하고 돈을 벌고자 한다면 다른 일을 해야한다. 사회에서 가정폭력, 성매매, 성폭력을 없애겠다는 정신을 가지고 일하면 우리의 동역자가 될 수 있고, 이를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다.”

사진=여성소비자신문

“호주제 폐지·국적법 개정·가정법원 확대 이뤄...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가장 큰 업적”

그간 해 온 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에 대해 묻자 그는 가족법개정운동과 호주제 폐지, 가정법원 확대, 국적법 등을 꼽았다. “저는 호주 제도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 호주 제도는 남계혈통을 중심으로 집안을 이어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관념적으로는 집에 구심점이 있어야 할 것도 같고, 별다른 피해를 주는 것 같지도 않으니 문제가 없다고 느껴진다. 그런데 논문을 준비하며 살펴보니 400개 이상의 다른 법 조항과 연결되어 있더라. 예를 들어 딸이 가장의 역할을 해서 집안을 꾸려 왔어도 유산 등의 모든 권리는 아들에게 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독립유공자의 연금의 경우, 연금 수령 대상자가 되려면 우선 같은 호적에 있어야 하고, 호주 승계를 받는 장남이어야 했다. 만약 수령 대상이 될 수 있는 집안의 남성이 사망했다면 그 남성의 배우자가 수령 대상자가 됐다. 즉 유공자 집안의 딸이 결혼했을 경우 호적상의 문제로 유공자의 손자에 속한 며느리에게 연금 수령권이 돌아갔다는 의미다.

호적이라는 말 자체가 민법상에 남아있으면 장자와 딸에 대한 차별, 장남과 차남에 대한 차별이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99년 ‘긴급제언을 통해 호주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칼럼을 써서 신문에 싣고, 1년 동안 매주 ‘호주제 클리닉’을 케이스 별로 정리해서 기고했다. 호주제 폐지는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 사회에 팽배한 인간 차별의 의식에 맞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양 원장은 또 “하나 더 꼽자면 국적법이 있다. 과거에는 결혼을 통해 이주해 온 여성들이 이혼을 할 경우 우리나라를 떠나야 했다. 그래서 남성들이 이를 빌미로 인질 잡듯 하기도 했고, 그런 이들과 많이 상담을 했었다. 이에 대해서도 칼럼을 쓰는 한 편 미국에서 머물던 당시 보고 온 제도와 법률을 참고해 국적법을 개정시킨 바 있다”고 말했다.

가정법원을 전국에 설치한 일도 그가 자랑스럽게 꺼낸 일화 중 하나다. 지난 1963년 이태영 박사가 설치한 서울 가정법원 이후 가정법원은 30년 이상 서울에만 있었다.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개원 1주년이던 2000년, 양 원장은 이를 전국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우리나라의 가정법원이 일본 제도를 벤치마킹 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김경덕 변호사를 초청해 ‘사법개혁과 가정법원’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전국에 가정법원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혼 숙려기간 3개월도 그때 제가 제안했다. 이후에 전국에 지방법원이 있는 곳에 가정법원이 설치됐고 이혼 제도도 개정되었다.”

사진=여성소비자신문

“앞으로 통일운동 나설 계획...NGO 여성들 위한 보금자리 마련도”

한편 그는 향후 통일을 위한 목소리를 낸다는 계획이다. “앞으로는 통일 운동에 여성들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으로 평화를 주장하는 것은 여성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양 원장은 이와 관련해 “우리나라가 지정학적 요건이 불리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대주의 사상 때문에 갈라져있어서 그런 것이다. 통일만 되면 일본이나 중국 등 주변국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통일을 해야만 후손들이 잘 살 수 있다”며 “조금 잘 살게 되니 조금 가진 것을 빼앗길까 그럴까, 요즘 대학생들 일부는 통일을 반대한다고 하지 않나. 그러나 워렌 버핏도 한국 통일은 독일과 다르다고 말한 바 있다. 주변 국가들이 전부 잘 살기 때문에 투자율도 높을 것이고, 이미 남한 개발이 잘 되어 있어서 통일 비용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광물 자원도 북한에 많다고 하고, 노동력이 싸기 때문에 개발도 원활할 것이다. 인구 문제도 해결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또 그는 후배들의 자립을 돕고 싶다는 생각도 밝혔다. 여성계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이들에게 보금자리를 내주고 싶다는 계획도 있다.

“이후 현재 일하는 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자체 건물을 한 채 올리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또 제가 사유지로 갖고 있는 땅을 기부해 NGO 단체에서 오랫동안 봉사한 여성들이 거주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대가 없이 오랫동안 일하고 연금 등도 받지 못해 어렵게 지내는 이들이 많다. 그들이 뜻을 모아 공동체를 꾸릴 수 있는 보금 자리를 만들고 싶다. 이에 동참해 주시는 분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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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안 기자  hann9239@wsob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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