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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그럴 수 있어그냥 넘어져 있자
김혜진 갈등관계 심리연구소 소장 | 승인 2019.08.28 17:33

[여성소비자신문]길을 가다 보면 넘어질 때가 있다. 툭툭 털고 금방 일어날 수도 있지만 크게 다쳐 병원에 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호되게 넘어져 아프고 쓰린데 내가 넘어졌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을 때가 있다. 빨리 일어나고 싶고 지금의 슬픔 따윈 훌훌 털어버린 다음 언제 그랬냐는 듯 까맣게 잊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마음은 기계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고 결심한 대로 따라와주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의지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자기 마음 하나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

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거라고 모진 말을 내뱉기도 한다. 물론 자기 딴에는 충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을까?

마음도 많이 아플 때는 쉬어야 하는 법이다. 내 마음이라고 해서 마음을 혹사할 권리는 없다. 오히려 마음이 내는 소리를 무시하면 언젠가 마음은 우리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는 말이 있다. 때로는 넘어지면 넘어진 대로 그냥 있는 것도 괜찮다. 슬프면 슬픈 대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도 나쁘진 않다.

누군가가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있어보자. 미우면 미워할 수 있는 만큼 마음껏 미워해보자. 매달리고 싶으면 매달려보는 것도 한 번쯤 해보자.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일어날 때가 올 것이다.

마음에는 자생력이 있다. 우리에겐 그 자생력이 회복될 때까지 누워 있을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지독한 감기에 걸리면 약을 먹고 쉬어야 하는 것처럼 마음에게도 회복할 시간을 주면 된다. 충분히 쉬고 일어나면 마음은 한 뼘 더 성장해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직업상 상담 치료가 필요한 내담자들과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어떤 때는 강의를 마친 후 몇몇 학생들의 사연을 듣고 상담을 해줘야 할 때도 있다. 강의 주제가 성폭력, 인권과 법, 피해자 치료 등 무거운 주제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가 있죠.”

상담할 때 자주 듣는 말이다. 오랫동안 아버지의 성폭력을 견뎌야 했던 한 아이는 칼로 자해를 하지 않으면 하루하루를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선생님, 나 같은 사람 이해가 안 가죠? 저는 하루하루 사는 게 힘들어요.”

지독한 좌절감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내담자를 만날 때면 나 마저도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다. 아무리 내가 심리학자이고 상담자라고 해도 좀처럼 객관화하기 어려운 사연은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나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마음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실 이들에게는 섣부른 위로가 오히려 상처가 된다. 그럴 때 나는 진실한 마음으로 내담자들의 말을 경청한다. 내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하는 순간이 바로 이때이다. 이들의 마음은 깊은 죄의식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다.

그들은 현재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들이 자신 스스로를 거부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나도 그런 고통을 겪었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몰라. 상담을 하다 보면 조금씩 나아질 거야. 반드시 나아질 수 있어.”

언뜻 들으면 별말 아닌 것 같아도 환자들이나 학생들은 이 말에 마음을 열고 다가와 준다. 그리고 이후에는 더 긍정적인 자세로 치료를 받는다.

하지만 모든 상황에서 이 말이 유용하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마음을 열려고 해도 모든 노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 모두 절박한 상황에 몰리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상대방의 고통을 100%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절망의 심연 속에 빠져 스스로를 세상과 분리한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나 조차도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있다. 그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말은 이것이다.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단, 이 말을 할 때는 한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형식적으로 위로하는 것이 아닌 진심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심을 담는다는 것은 상대의 아픔을 헤아리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경청하고, 오랫동안 기다려주는 것도 포함된다.

진정성과 인내심이 전해질 때 사람의 마음은 열린다. 절망과 죄의식에 잠식된 영혼에게 진심은 굳게 잠긴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다.

김혜진 갈등관계 심리연구소 소장  rossoj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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