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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겸 칼럼⑫] 기우제라도 해야 하나? 자유로운 수행인의 차 한잔
하도겸 나마스떼코리아 대표 | 승인 2019.07.30 15:23

[여성소비자신문]우리 고대사의 고전 ‘삼국유사’를 보면, 단군신화의 환웅이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내려 왔다고 한다. 그리고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왕들이 직접 명산대천에 기우제를 올렸던 기록들도 ‘삼국사기’에 보인다. 삼국시대에는 왕이 고조선의 우사를 대신했나 보다.

세시풍속 가운데 정월대보름에는 줄다리기를 했는데 이 때 줄을 큰 뱀 아니 용이라고 생각해서 신나게 잡아당겼다고 한다. 쌍룡상쟁(雙龍相爭)을 통해 비구름을 기대했다고 한다. 부정화(不淨化)라고 해서 용이 산다고 신앙되는 용소(龍沼)·용연(龍淵) 등에 개나 돼지를 잡아서 생피를 뿌리거나, 머리를 던져 넣기도 했다.

심지어 조선시대에는 한강이나 박연폭포에 용의 원수인 호랑이 머리를 넣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을 노린 것인가? 이런 일들을 왜 했을까? 심한 경우에는 짚으로 만든 용을 만들어서 끌고 다니기도 했다. 이 모두 이것을 본 용이 화가 나서 폭우를 퍼붓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수신(水神)인 용신의 직무유기에 대항하는 촛불과 같은 것이리라.

라오스는 ‘분방파이’라고 해서 하늘에 수제 폭죽을 쏘아 올리는 축제를 연다. 우리 민속에도 산상분화(山上焚火)라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장작·솔가지·시초(柴草) 등을 산 위에 산더미처럼 쌓고 불을 지르기도 했다. 만화 원피스에서는 인디언이 모닥불 주위를 춤추며 댄스 파우더 가루를 불태우던 기우제를 소재로 삼기도 했다.

하늘을 향해 불을 지르는 것은 신문고를 울려서 마을 아니 나랏 사람들 모두가 한마음으로 진심으로 그리고 간절하게 하늘에 용의 직무유기를 알리려는 것이었을까? 여하튼 가뭄이 심해지면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땅 먼지가 나도록 뛰놀거나 강강술래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늘의 자손인 백성들은 아버지인 하늘에 자식들의 염원을 전했나 보다.

용신을 인격화하고 희화화하고 상사인 하늘에 ‘고자질’을 해서라도 비를 염원한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외계인들이 보면 정말 귀엽다고 칭찬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해프닝들은 동양의 전근대사회가 농경사회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중일은 물론이고 남방불교가 중심인 동남아 역시 농경기에 비가 안 내리면 마을은 물론이고 인륜이 붕괴되어 나라가 무너질 수 있는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중국 고대의 현인 순자는 기우제가 사기극에 불과하다며 어차피 결국 비는 때가 되면 오는데 백성을 현혹시키고 낭비를 하지 말라고 했나 보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폭정은 그나마 참을 수 있지만 가뭄으로 기근이 지속되고 먹거리 조차 부족하게 되면 백성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으킨 폭동이 왕을 죽이고 왕조까지 전복시킨 사례는 적지 않을 듯싶다. 요즘도 가뭄은 국가재난에 속하는 중요한 사항이다.

최근에 지속된 봄 가뭄으로 농업용수가 부족하고 산불도 잦아지고 있다.

이럴 때는 기우제라도 해야 하나?

요즘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언제부턴가 우리 현대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 아니 많이 병들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아파하는데 그 가운데는 자신이 아픈지도 모르고 있다. 정신과 관련 상담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상태로까지 모두가 지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싶다.

얼마전 한 크리스챤 여성이 밥을 한번 같이 먹자고 해서 만났다. 식사가 나오자 기도를 하자고 한다. 결혼식에 돈만 보내듯, 절에 잘 안 나가고 등만 켜는 가나안(안나가를 거꾸로 표기한 말) 신자지만, 그래도 명색이 불자여서 합장을 하고 수저를 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분위기 싸해졌다.

그러다 나온 말. “사탄은 처음 봐요.” 이런 경우를 처음 당해서 그런지 ‘내가 악마였나?’라는 생각마저 살짝 들었다. 좀 많이 무서웠지만 겁내거나 도망가지 않고 그 한마디에 대화는 사라졌고 차만 계속 리필을 요청하고 조용히 먹고 끝까지 아무 일 없이 나왔다.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나의 자화상이다. 이미 우리 모두가 이렇게 아프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걸까?

자유자재(自由自在)라는 말이 있다. 자기(自己)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인데 부처님도 이 세상에 다시 나타나시면 그게 안될 것 같다. 삶이 수행이다. 이런 치열한 고통이 반복되고 확대재생산되는 삶 속에서 수많은 인연들의 무게감은 이미 짊어지기 어렵기까지 하다.

행복에 목마르고 지친 우리에게 단비와 같은 물질문화는 바로 차가 아닐까 싶다. 힘들 때 차한잔의 여유를 찾는 것은 가뭄 때 기우제를 지내는 것 보다 훨씬 나은 것이 아닐까? 바쁘고 힘든 가운데 수행자는 차판에서 차호와 찻잔을 두고 찻물을 부으며 그 안에서 자유자재하다. 마치 장기나 바둑판처럼 차판은 물질간의 경계와 결계, 그리고 진법을 펴는 자리가 된다.

치열한 자리 다툼 속에 결국 오행은 기둥이 되는 사람으로서의 팽주와 만나면서 나중에는 차나무를 만나면서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팽주를 하든 그 옆에서 도반으로서 대접을 받든, 평상에서 벗어나 ‘일기일회’의 특별한 시간과 공간의 ‘장’을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차회를 통해서 맑고 밝은 새 인연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一微塵中含十方(일미진중함시방) 一切塵中亦如是(일체진중역여시)
하나의 미진(작은 티끌) 속에 시방(온 세계)가 들어있고, 일체의 미진들이 다 그와 같다.
물방울 하나에도 너와 만나는 그 짧은 시간에도 억만겁의 인연이 담겨 있다.

나와 남의 몸에 차를 채우고 비우면서 넓었던 이야기는 어느새 깊어진다. 세상의 숱한 인연들이 찾아 왔다가 자신의 자리를 찾아 나가며 왕래한다. 오는 인연 막지 않고 가는 인연 잡지 않는다. 남으면 좋은 것만 남으면 좋은데 그렇지 않는 게 남는 게 늘 문제가 된다.

나가야 할 낡은 것은 내보내고 들어와줘야 할 새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어쩌면 불교에서 말하는 반야 지혜가 아닐까 싶다. 차 한잔을 통해 나와 남을 여읜 우리 몸 안에 그리고 마음 속에 평온의 지혜의 숲을 만들 수 있다.

딱 차 한잔 만큼의 짧고 어쩌면 좁은 쉼일지 모르지만 그 안에서 수행자라면 누구나 희망의 나무들이 이루는 커다란 숲을 만들 수 있다. 이와 같이 차 한 잔은 선배와 후배간의, 세대간의, 스승과 제자간의 소통을 뜻한다. 수행자에게는 깨달음으로 향한 지혜를 나누는 일이기도 하다.

글 쓰느라 목이 참 마르다. 이럴 때는 차 한잔 마셔야 겠다. 자유자재한 수행자가 우주를 마시고 여의워야 할 삼독의 인연을 털어보내는 일에 게을러서야 되겠는가!
끽다거(喫茶去)? 할(喝)

하도겸 나마스떼코리아 대표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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