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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순구 칼럼]독립선언문 인쇄 출판사, 普成社의 자취3·1운동 100주년에 고려대학교에서 역사 보듬기
명순구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장 | 승인 2019.05.07 15:39

[여성소비자신문]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독립운동사·사회문화사·국제정치사 등의 시각에서 그 의미가 그야말로 묵직하다.

3·1운동 하면 민족대표 33인과 독립선언서가 떠오른다. 독립선언서는 3·1운동의 기폭제였으며, 만세운동을 오랜 기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었다.

독립선언서는 또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세계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파리강화회의(1919년 1월~6월) 등 세계만방에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지적인 수단이었다. 그러다 보니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에 독립선언서가 자주 언급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

독립선언서는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좀 색다른 시각에서 독립선언서의 역사를 보듬어 보고자 한다. 그것을 제작한 출판사에 관한 역사이다. 흥미롭게도 그 역사에는 고려대학교가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

독립선언서의 제작과 보성사의 연혁

손병희

독립선언서는 어떤 과정으로 제작되었을까? 독립선언서는 천도교 교주 손병희(孫秉熙, 1861~1922)의 특명으로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초안하고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하였다.

조판작업은 신문관(新文館)에서 수행했는데, 신문관은 1910년 최남선의 주도로 설립된 고전 간행 및 사전 편찬을 목적으로 결성된 모임인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의 출판사였다.

인쇄는 보성사(普成社)에서 수행하였다. 보성사의 사장 이종일(李種一, 1858~1925)은 김홍규(공장감독), 장효근(총무)과 함께 극비리에 독립선언서를 성공적으로 인쇄하였다.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서명자들의 연고지인 경성·평양·청주·용강·해주·선천·원산·의주 등지로 전달되었다.

1919년 당시 보성사는 천도교(교주:손병희) 소유였는데, 이는 1910년 경영권을 인수한 결과이다. 원래 보성사는 1905년 4월 설립된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와 관련된 출판사이다.
1905년 이용익(李容翊, 1854~1907)은 고종황제의 각별한 도움 아래 ‘교육구국(敎育救國)’의 목적으로 보성학교(고등교육기관으로는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한다.

이런 배경으로 보성전문은 황실 문양인 오얏나무 꽃(李花) 문양을 모표로 사용했다. 1905년 당시에는 고종의 배려로 관립아어학교(官立俄語學校, 러시아어학교) 건물을 빌려 사용했다. 이 때의 학과는 법률과와 이재과(경제학과 경영학의 혼합)의 두 개였다.

이로써 이 나라에서 최초로 법학과 경제·경영학에 대한 고등교육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아어 학교의 현재 위치는 종로 조계사 옆 수송공원이다. 이용익은 1906년 7월 아어학교에 이웃한 200여 간으로 구성된 김교헌(金敎獻, 1868~1923)의 대저택을 매입하여 학교 시설을 대폭 정비하는데, 그때 학교 안에 부속 출판사로서 보성사를 설립한다.

학교의 위치는 현재 종로 조계사이다. 그러므로 고려대학교의 발원지를 조계사 터로 보아도 무방하다(그 후 보성전문은 종로에서 두 차례 이사를 하다가 1934년 현재의 안암캠퍼스로 이전).

이용익
아어학교 시대 보성전문
보성전문 오얏꽃 모표

 1905년 을사늑약과 국권침탈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용익은 러시아로 망명하고 1907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사망한다. 그의 손자 이종호(李鍾浩, 1885~1932)가 그 뒤를 승계하지만 그마저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면서 보성전문과 보성사는 위기에 빠진다.

이 위기에서 여러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1910년 12월 보성학교와 보성사의 경영을 인수한 것이 바로 천도교(교주:손병희)였다. 당시 천도교는 보성의 재정을 충분히 뒷받침했는데, 이는 전국의 천도교도들로부터 올라오는 ‘성미’(誠米) 덕택이었다. 성미란 천도교인이 매 끼니마다 쌀 바가지에서 한 숟갈씩 떠서 모아두었다가 매주 그것을 교회에 바치는 쌀이다. 전국 300만 천도교인의 성미가 보성전문과 보성사를 지킨 것이다.

보성전문과 보성사, 그리고 회화나무

천도교가 보성전문과 보성사의 경영권을 인수한 후인 1914년 운동장 한 편에 신 교사(2층 양옥 117평, 부속건물 30평)를 신축한다.

1914년 신축 교사

위 사진에서 뒤 정면의 ‘ㄷ자’ 건물이 주건물이고 그 사진의 오른쪽 큰 나무 뒤로 지붕이 약간 보이는 것이 보성사 건물이다.

보성사

오른쪽 사진에서는 보성사 건물이 주로 보이고, 보성전문 주건물은 그 왼쪽 부분이 약간 보이고 있다. 1919년 당시 보성사는 조선광문회가 운영하는 신문관과 더불어 당시 인쇄계를 주도하였다.

천도교에는 중앙교당에 인쇄소(창신사)가 따로 있었지만 보성사와 병합하여 명칭을 ‘보성사’로 사용했다.

보성사는 1906년 설립될 때에는 보성학교에서 사용할 교과서를 인쇄했으나, 천도교가 인수한 후부터는 학교 교과서 외에 교회용 출판물, 문화서적 등도 인쇄하여 출판문화 향상에 크게 공헌하였다.

1919년 2월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후에도 윤익선(尹益善, 1871~1946)을 중심으로 일제의 탄압에 대항하는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하여 3·1운동의 이념을 계속 전파하였다.

조선독립신문을 인쇄한 곳도 보성사였다. 이에 일본 경찰은 보성사를 즉각 폐쇄하였고, 1920년 6월 불을 질러 건물을 전소시켰다. 그리하여 보성사는 현재 그 터만 남아 있다. 여러 사료를 종합해 볼 때 보성사의 위치는 현 조계사 범종루 약간 오른쪽 부근일 것으로 추정된다.

보성전문의 주건물인 ‘ㄷ자’ 건물의 위치는 ‘ㄷ자’의 터진 부분이 현 조계사 범종루 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볼 수 있다. 1999년 3·1운동 80주년을 맞아 수송공원에 기념비를 세워 그 곳을 보성사 옛터로 기록하고 있으나, 보성사의 실제 위치는 그 기념비로부터 약 50여 미터 떨어진 조계사 경내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14년 신축 교사와 회화나무
수송공원 3·1운동 80주년 기념 부조

보성전문과 보성사 사진을 보면 큰 나무들이 눈에 띤다. ‘ㄷ자’ 건물 앞마당, 그리고 보성사 앞에 보이는 나무가 그것이다. 수송공원에 설치한 3·1운동 80주년 기념부조에도 나무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다. 그 부조에는 ‘사립보성학교(私立普成學校)’와 ‘보성사(普成社)’의 간판도 선명하다.

조계사 회화나무

그 나무는 회화(槐花)나무이다. 보성전문과 보성사가 있던 터에는 회화나무가 유난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회화나무의 존재는 그곳이 학자들의 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보성전문의 터이며 고려대학교의 발원지에 회화나무가 많은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곳이 원래 김교헌과 그 조상이 생활하던 조선시대 명문대가의 터였기 때문이다.

1914년에 신축된 ‘ㄷ자’ 건물 앞뜰의 회화나무는 지금도 건재하다. 그 나무는 현재 조계사 대웅전 앞 수려한 모습의 회화나무이다. 회화나무는 자유롭고 호방한 가지, 나무 중에서 잎이 가장 늦게 돋고 가장 늦게 지는 모습이 군자의 성품을 닮았다 하여 예로부터 학자나무(學者樹)로 불리며 선비와 학문을 상징했다.

2017년 회화나무 종자채취 행사

중국 국자감과 공묘(孔廟), 우리나라 궁궐과 서원 등에 회화나무가 물결치는 이유이다. 학문의 전당 고려대학교의 발원지에는 그 수려한 회화나무가 지금도 그대로이다(서울시 지정보호수 제78호).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은 최근 역사 보듬기 프로젝트의 하나로 그 회화나무에서 종자를 채취하여 고려대학교 캠퍼스에 식재하는 행사를 진행하였다.

2017년 12월 조계사의 협조로 그 나무에서 종자를 채취한 후 2018년 봄 농장에서 발아시켜 묘목으로 성장시켜 2019년 5월에 캠퍼스에 식재한 것이다.

학문의 전당인 고려대학교 캠퍼스에 고려대학교 발원지에서 유래한 학자나무를 심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가 크다는 이유이다.

2019년 회화나무 식재행사
2019년 회화나무 식재행사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는 고려대학교의 전신 보성전문 부속 출판사였다. 독립선언서 외에도 사실 보성전문과 3·1운동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910년 이래 보성전문 경영자 손병희는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했고,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위를 주도한 학생대표 강기덕은 보전 법과 재학생이었고, 보성전문 교장 윤익선(보전 법과 1회 졸업)과 방정환(보전 법과 1918년 입학, 3·1운동 가담 혐의로 퇴학)은 ‘조선독립신문’을 제작하여 3·1운동의 뜻을 대중 속에 전파하였다.

민족대표를 포함하여 3·1운동의 주동자 48명에 대한 재판이 특히 국내외의 관심사로 떠오른 가운데 재판의 변호사 그룹에서도 보성전문이 돋보였다. 허헌(법과 제1회), 정구창(법과 제2회), 박승빈(후에 보성전문 교장)이 그들이다. 그 중 허헌(許憲: 1885~1951)은 재판 과정에서 스타로 이름을 떨쳤다. 허헌은 해당 재판의 관할이 적법하지 않는다는 소위 ‘공소불수리론’을 주장하여 1심 재판을 승리로 이끌었다.

100년 전 보성전문은 3·1운동을 위한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가 종로 조계사 터에 있었고, 그곳에는 학자수(學者樹)로 불리는 회화나무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있다. 그 모든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보성전문과 보성사의 회화나무, 그 자손이 고려대학교에서 자라고 있다.

명순구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장  skmyoung@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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