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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학당의 여성·양성평등·계몽교육이 3.1 운동 이끌어한국여성연구원 ‘3.1운동, 여성 그리고 이화’ 학술대회 개최
한지안 기자 | 승인 2019.03.19 17:01
사진=여성소비자신문

[여성소비자신문 한지안 기자] 이화여자대학교는 15일 ECC 이삼봉홀에서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3.1운동, 여성 그리고 이화’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주최로 3.1 운동을 여성사적 관점으로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김혜숙 이화여대 총장은 개회사를 통해 “이화의 역사는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식민시대와 전쟁, 민족과 국가뿐아니라 여성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해 왔다”며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곳곳에서 헌신해왔으나 지금까지 여성들의 역할과 경험들이 비가시화 되어왔음을 생각할 때, 각계각층의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3.1운동에 대해 여성사적 관점에서 논의할 수 있는 이 자리가 매우 뜻깊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특히 3.운동에 참여한 이화학당 학생들의 정신은 이화의 가치를 만들어내는데 크게 기여 했다. 이러한 이화의 정신은 오늘날의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시 그 의미가 조명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여성연구원 허라금 원장은 “비극적인 한국 근현대사를 지나면서 수많은 여성들이 역사에 투신하여 민족의 한사람으로서 자신을 헌신해 왔으나 지금까지 이들의 역할은 대부분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잊혀졌다”며 “(이날 행사를 통해) 항일 운동에 참여했던 여성들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고 당시 여성 고등교육제도가 형성되던 시대적 상황을 조명해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덕주 교수 “이화학당 교사 학생들, 항구적 민족운동 참여해”

이날 기조 발제는 이덕주 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가 ‘이화학당과 3.1운동’을 주제로 진행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이화 학당 33년의 역사는 3.1운동의 준비과정’이다. 이 교수는 “1886년 학교 설립 이후 꾸준하게 추구해왔던 근대 여성교육, 양성평등 교육, 민족의식 계몽교육의 결과물로 이화학당의 3.1운동 참여가 이루어졌다”고 봤다.

이 교수는 “언제부터 이화학당 교사와 학생들이 3.1 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하였는지 정확한 시점을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짧게는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 승하소식이 전해진 이후 교사와 학생들이 상복을 입고 덕수궁 대한문 앞에 나가 망곡례를 행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사진=여성소비자신문

이 교수는 “학생들이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동안 교사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며 “김독실의 경우처럼 거리에 나서 학생들과 만세를 부른 교사도 있었지만 많은 교사들은 ‘독립선언’ 이후를 내다보며 보다 체계적이고 항구적인 민족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항일민족운동단체 조직운동에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후에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연결되는 여성 항일 비밀결사는 일본에서 2.8독립선언식에 참석한 이후 국내로 잠입한 ‘도쿄유학생’ 황애덕, 김마리아의 이화학당 방문으로 구체화됐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여성 항일 비밀결사’의 주역은 이화학당 교사 박인덕, 신준려, 김활란 등이었다. 비밀 모임 장소는 이화학당 기숙사였다.

이 교수는 “특히 황애덕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이화학당은 또 한 번 여성 독립운동의 요람이 됐다”고 평가했다.

이날 이 교수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화학당 교사 및 학생들로 박인덕, 신준려, 하란사, 감독실, 장필순, 유점선, 현덕신, 안숙자, 김활란, 오활란, 인순남, 최문순, 손진실, 김경신, 동우실, 서명학, 노예달, 신특실, 조신성, 김애은, 김복희, 유관순, 박승일, 최매지, 이애라, 이화숙, 신마실라, 권애라, 유예도 등을 꼽았다. 이들은 서울, 평양, 아산, 공주, 함경도, 만주 등 각지에서 3.1운동과 항일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되거나 국외로 망명했다.

이 교수는 “이화학당의 민족운동 전통은 33년동안 추진된 이화학당 교육의 결과였다”며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상태로 이화학당에 들어와 근대학문과 기독교를 배운 여성들이 자의식을 때치고 남성과 일반 시민들 앞에서 자기 의견과 생각을 발표하고 행동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현혜 교수 “3.1운동은 민족의 공통된 기억”

이날 발제자로 참여한 양현혜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에 따르면 3.1운동은 3월부터 5월까지 총 1542회에 걸친 만세 시위로 이어졌다. 참가 인원은 202만여명에 달했다. 당시 전 조선의 인구는 약 2천만 정도였다.

사진=여성소비자신문

양 교수는 “박은식의 ‘한국 독립운동 지혈사’에 따르면 3월 1일부터 5월 말 사이에 사망자는 7509명, 부상자는 1만5961명, 검거된 사람의 숫자는 4만6948명에 달했다”며 “이어서 일어난 중국의 5.4운동과 비교할 때 이는 엄청난 희생을 동반한 항일 민족 독립운동”이라고 말했다.

양 교수는 또 “3.1 운동은 과거의 민족운동, 즉 의병운동과 계몽 운동을 반성하며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는 오랜 준비 끝에 이루어진 것”이라며 “과거 의병운동이 위정척사 사상에 입각해 유생과 농민 대중이 주축이 되어 즉각적인 무장 투쟁을 시도했다면 계몽운동은 개화지식인을 주축으로 하는 장기적인 실력 양성 노선을 취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민중층과 봉건 지식인인 유생들에 근대적 지식인인 학생, 종교인과 여학생, 간호원, 기생 등 여성들이 3.1운동을 확대해 전국적인 항일 독립운동으로 발전시켰다”고 평가했다.

다만 양 교수에 따르면 독립 후 3.1운동에 대한 해석은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띄게 됐다. 양 교수는 “이는 3.1운동에 대한 해석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 곧 정치적인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도 유리했기 때문”이라며 “3.1운동에 대한 기억은 남과 북의 정권이 독점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남과 북 양측이 각각의 체제의 정통성을 확보하기위해 만들어낸 해석의 틀에서 3.1운동을 해방시켜야 한다”며 “반세기 동안 각각 축적한 연구 성과를 상호 존중하며 3.1운동에 대한 기억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지안 기자  hann9239@wsob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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