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특별법 제정을 요구 중인 피해자 가족. <사진제공=뉴시스>

- 소비자 경시 기업에 소비자가 철퇴 내려
- 집단소송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도 검토

[여성소비자신문 김영 기자] 2016년은 ‘소비자 주권’ 회복에 있어 여러모로 의미 있는 한 해였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진실이 장장 5년여 만에 밝혀졌다. 재계를 대표해 온 삼성전자와 현대차가 소비자 안전을 무시한 행태를 보이다가 큰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과거 존중받지 못하던 소비자 권리보장이 시대 변화 속 다른 그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기업경영의 주요 요소로 부상한 것이다.

올해 미국에서는 소비자의 소비 트랜드를 분석한 한 대형마트의 깜짝 쿠폰 이벤트가 큰 화제에 올랐다.

고등학생 딸 밖에 없는 집으로 임산부용 할인쿠폰이 배달됐고, 이후 그 고등학생 딸이 임신중이란 사실이 추가로 알려진 것. 이 사건 이후 주목받은 이유는 부모도 몰랐던 고등학생 딸의 임신 사실을 어떻게 기업이 먼저 알았느냐 하는 것이다. 

비밀은 딸의 온라인 쇼핑 리스트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고등학생 딸이 임신 관련 물품 구매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기업에서 그에 맞는 맞춤형 쿠폰을 제작해 보낸 것.

소비자맞춤형 미래사회를 예상케 한 이 사건은 향후 소비문화가 어떻게 변화해 나갈 것인지를 보여준 사례로도 거론되고 있다. 

또한 3차 산업혁명이 대량생산 대량소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IT기술이 결합된 4차 산업혁명에서는 소비자의 선택을 빠르고 정확하게 잡아낸 것이 기업 활동의 성공 열쇠가 될 것이란 전망으로도 이어졌다.

소비자단체들 중심으로는 “4차 산업혁명에 앞서 소비자를 대하는 우리 기업들의 태도에도 큰 변화가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한순간 시장에서 도태될 수 있을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소외 받아온 소비자 주권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는 생산자와 함께 경제 생태계를 구성하는 양대 주체이다. 생산자가 제품과 서비스 등을 시장에 내놓으면 이를 합당한 가격에 구매하는 것이 소비자인 것으로 소비자로서는 자신이 지불한 대가 만큼의 권익을 보장 받는 게 당연한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장착된지 오래된 미국과 유럽 등 서구사회에서는 이 같은 소비자 권리에 대해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 왔고 또 존중해 왔다.

반면 우리의 경우 급속한 산업화 과정 속에서 ‘소비자의식’이란 것 자체가 경제발전에 별 상관없는 가치로 여겨진 측면이 없지 않다. 그렇다 보니 성숙된 소비문화 역시 형성되지 못했다는 게 국내 소비문화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평가였다.

과거 국가 주도 국산품 애용운동이나, 최근 소비자를 비하해 부르는 ‘고갱님’·‘호갱’·‘봉’·‘손놈’ 등의 표현 등은 성숙하지 못한 국내 소비문화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2016년은 소비자 의식 개조에 있어 여러모로 의미 있는 한 해였다.

소비자 주권과 안전을 무시한 일부 기업의 부조리한 처신에 소비자들이 직접 들고 일어서 강력한 문제제기를 했으며 그 결과 시장에 큰 변화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검찰로부터 징역 20년형이 구형된 신현우 전 옥시 사장. <사진제공=뉴시스>

옥시와 삼성 그리고 현대차의 자멸

2016년을 산업계와 소비시장을 언급하며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옥시 가습기살균제’ 사태였다.

사건의 시작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인불명의 소아 폐렴 환자가 이듬해인 2007년까지 급증하기 시작한 것으로, 2011년에 이르러서야 질병관리본부는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환자들의 경우 폐손상 발생 위험도가 다른 환자들에 비해 47.3배 더 높다’고 발표했다.

23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급성 폐손상 사건의 주범으로 ‘가습기 살균제’가 지목되자 피해자 가족 8인은 2012년 옥시 등 살균제 제조업체를 검찰에 고발했으나 이후로도 가습기 살균제 파문은 별다른 해결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2013년에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구제법’이 국회서 보류됐고, 정부의 피해자 지원 예산만 조금 편성됐을 뿐이었다. 그나마 2014년에는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손상’을 지적한 환경부 조사가 종료됐는데 그후로도 1년여가 넘게 정부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가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올해 5월부터로 피해자 가족과 환경단체 등의 지속적인 문제제기 속 언론이 이 사건에 주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움직이기 시작한 여론은 직접적인 사태 발생 후 5년여 넘게 꼼짝 않던 검찰까지 나서게 만들었다. 그동안 부실수사로 일관해 왔다 비난받던 검찰이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와 함께 제조업체들에 대한 단죄에 들어간 것이다. 특히 검찰은 올 10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가 가장 많이 나온 옥시의 전 한국대표인 신모씨에 대해 징역 20년형을 구형하기도 했다.

가습기 살균제 파문은 치약과 비누 화장품 그리고 섬유유연제 등 생활용품 전반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살균제 원료로 쓰인 화학제품이 이들 제품의 방부제 원료로도 사용됐다는 게 알려지며 이들 제품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불매운동이 일어난 것.

그런가하면 사회 일각에서는 화학제품 전반에 대한 공포심이 반영된 이른바 ‘화학물질 포비아’ 현상이 불거져 나타나기도 했다.

가습기 살균제 파문에 대해 한 소비자단체 관계자는 “소비자에게 해를 입힌 제품은 시장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되며 피해를 방관하는 기업은 시장에서 퇴출돼야 마땅하다”면서 “이러한 기업의 제품을 소비자는 더 이상 구입하고 싶지도 않고, 기존에 구입한 제품도 사용하기를 원치 않는다. 옥시의 제품은 이미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잃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소비자가 없다면 기업은 있을 수 없다. 소비자를 사망하게 만들고 다치게 해 놓고도 책임을 지지 않는 기업은 이제 우리 사회와 시장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고 싶다”며 이번 사태가 가져온 의의에 대해 밝혔다.

소비자를 무시한 기업경영은 한국을 대표해 온 두 재벌기업인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도 흔들어놨다.

갤럭시노트7 발화 사고에 대해 사과하는 고동진 삼성전자 사장. <사진제공=뉴시스>

삼성전자의 경우 올 9월 애플사의 ‘아이폰7’에 맞춰 역대 최고의 야심작이라며 시장에 내놓은 ‘갤럭시노트7’이 발화 및 폭발 논란에 휩싸이며 출시 두달여 만에 시장에서 그 모습을 감추는 굴욕을 맛보아야 했다.

이전에도 삼성전자에서는 휴대전화 배터리 폭발사고가 종종 발생했다. 충전 중이던 휴대전화가 배터리 과열 등의 이유로 검게 나는 사고가 심심찮게 이어왔던 것으로 건수로 보면 연간 1~2건 정도는 늘상 있어왔다.

다만 이는 여타 휴대전화 제조사 역시 마찬가지로 그때마다 이들 휴대전화 제조사에서는 ‘외부 충격에 의한 발열’ 내지 ‘블랙컨슈머의 악의적인 조작’이라 이를 규정하며 사측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삼성전자는 갤노트7 폭발사고 초기 본인들 과실을 인정하기에 앞서 책임을 다른 곳으로 떠넘기는데 급급한 모습을 보여줬다. 소비자의 사용 부주의를 거론하는가 하면, 배터리 제조사인 삼성SDS측의 문제라고 밝힌 것이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리콜받은 제품까지 총 16건의 갤노트7의 폭발사고가 한국과 미국·대만·일본·말레이시아 등지에서 발생하자 더 이상 책임을 미룰 수 없었고 출시 두 달 만에 제품 단종을 선택했다.

단종 조치 후 삼성전자는 “제품 안전성 검사를 소홀히 한 채, 전과 같이 사고 책임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려 했다”는 비난에 휩싸였다. 또한 삼성전자는 갤노트7 생산 중단으로 피해를 보게 된 한국 소비자들을 상대로 적절한 보상대책마저 내놓지 않아 추가적인 논란까지 자아낸 바 있다.

삼성전자가 갤노트7 사태로 곤혹을 치르는 동안 재계 2위 현대차 역시 국내 소비자 홀대 문제로 큰 위기를 맞이했었다.

자체 개발한 세타 엔진에서 소음발생과 엔진정지 등 심각한 결함이 발견됐음에도 사측이 이를 대외에 알리지 않았고, 미국에서 실시한 리콜마저 한국에선 시행하지 않았다는 내부폭로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앞서 현대차는 자동차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엔진 관련 GDI계열 세타·람다 엔진 등을 개발해 세상에 내놓은 뒤, 엔진 효율이 타 엔진에 비해 높다고 여러차례 강조해 왔다. 또한 이를 현대차는 물론 계열사인 기아차의 주요 모델에 장착해 왔다.

해당 소식이 전해지자 그렇지 않아도 현대차의 수출·내수용 차량 차별 의혹 등을 가지고 있던 국내 소비자들은 회사에 대한 반감을 있는 그대로 쏟아냈고, 지난해부터 이어진 현대차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올해 역시 지속해 나타났다.

집단소송제·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가능성 높아져

‘소비자를 무시했다’고 비난받는 옥시와 삼성전자·현대차 등은 올 한해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특히 옥시는 한국 시장 철수설까지 나돌 정도로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다.

다만 이들 기업들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진정 소비자를 우선하는 정책을 펼칠지에 대해선 의문이 많은 게 사실이다. 국내 법상 불법 행위가 적발된 기업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조치가 매출 10% 수준의 과징금 등 상당히 낮기 때문이다. 이에 “현 과징금 제도 아래서는 기업들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여러 소비자단체와 정치권을 중심으로는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 필요성도 점차 높아지고 있는 분위기다.

보수정당 소속임에도 재벌개혁 전문가로 자주 거론돼 온 이혜훈 새누리당 의원 역시 재벌 개혁 및 소비자 주권 보호 등을 위해 빠른 시일 내 집단소송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여러 차례 밝혀왔다.

지난 7월 <여성소비자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도 이 의원은 “옥시 사태를 보고 많이 분들이 공감을 하는 부분이 있는데 ‘집단소송제’ 도입이 그것이다”고 강조했다. 그는 해당 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업체 잘못으로 피해를 보고 있으나, 변호사까지 고용해서 수년간 법원을 쫓아다니면서까지 피해보상을 받을 수는 없다. 그래서 대다수 사람들이 업체와의 소송전을 중도에 포기해 버린다. 그렇다보니 기업들은 소비자들이 소송을 걸어 와도 중도에 포기해 버릴 걸 알기에 마음 놓고 나쁜 짓을 하는 거다. 옥시도 그랬다. 이 경우 집단소송제가 필요하다고 예전부터 주장해 왔다”고 밝혔다.

이 의원은 이어 “집단소송제가 도입되면 피해를 입은 어떤 사람이 재판을 해서 승소를 하게 될 경우 판결의 기판력이 유사한 피해를 입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동 확장이 된다”고도 설명했다.

지난달 22일 국회에서 열린 ‘공정한 시장질서 구축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서도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와 집단소송제 입법에 대한 여러 의견들이 도출됐다.

토론회에 참석한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하도급법 등 일부에 한정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공정거래법 위반 일반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집단소송법이나 징벌적 손해배상, 사인의 금지청구 제도 등을 도입해야 한다”면서 “적어도 소비자 내지 불공정 집단 소송만이라도 도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같은 토론회에서 김경만 중소기업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 역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공정거래법 도입과 불공정거래행위에 대한 처벌기준 및 과징금 감면기준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부 소비자단체들은 직접적인 입법청원 운동에도 나섰다.

지난 9월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는 ‘집단소송제 입법청원을 위한 10만명 서명운동’ 발대식을 개최했다. 해당 서명운동에는 한국소비자교육중앙회, 한국여성소비자연합, 한국YWCA연합회, 한국소비자연맹, 소비자시민모임, 한국소비자교육원, 한국YMCA전국연맹, 녹색소비자연대, 소비자공익네트워크, 한국부인회총본부 등 10개 단체가 참여했다.

이들 단체에서는 “10만명 서명운동은 잇따른 소비자의 집단피해를 막고 소비자 권리를 지키기 위함”이라 밝히며 “집단소송법,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통해 반사회적 기업에게 확고한 책임을 물어 사후 피해구제에서 개인들의 대항력을 키워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민단체는 물론 여야 정치인까지 나서서 재벌개혁과 시장변화를 요구하며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요구하자 정치권 내에선 “2017년 대선에 맞춰 중도·진보적 대선후보를 중심으로 해당 안건이 주요 공약에 포함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김영 기자  young@wsob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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