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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시 읽기] 김기택 ‘봄날’
구명숙 숙명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3.04.13 10:19

[여성소비자신문] 할머니들이 아파트 앞에 앉아 햇볕을 쪼이고 있다.

굵은 주름 잔주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온몸을 노근노근하게 지지고 있다.

마른버짐 사이로 아지랑이 피어오를 것 같고

잘만 하면 한순간 뽀얀 젖살도 오를 것 같다.

한철 폭우처럼 쏟아지는 빛을 양껏 받는다.

미처 몸에 스며들지 못한 빛이 흘러넘쳐

할머니들 모두 눈부시다.

나무마다 푸른 망울들이 터지고

할머니들은 사방으로 바삐 눈을 흘긴다.

할머니 주름살들이 일제히 웃는다.

일생에 이렇게 환한 날이 며칠이나 되겠는가.

눈앞에는 햇빛이 종일 반짝거리며 떠다니고

환한 빛에 한나절 한눈을 팔다가

깜빡 졸았던가? 한평생이 그새 또 지나갔던가?

할머니들은 가끔 눈을 비빈다.

 

할머니들이 아파트 앞에 모여 앉아 따스한 봄볕을 쪼이고 있는 풍경을 보면, 동네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봄 햇살을 받으며 생각에 잠긴 할아버지들을 떠올리게 한다. 봄을 즐기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공간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나 서로 다르다.

얼어붙은 겨울을 견뎌낸 노인들의 봄나들이는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듯 새삼 “마른버짐 사이로 아지랑이 피어오를 것 같고/ 잘만 하면 한순간 뽀얀 젖살도 오를 것 같다.”

나무도 푸른 망울들이 터지고 골목 안에 봄이 가득 채워진다. 할머니의 주름살들이 일제히 웃으며 활짝 펴진다. 주름살 속에서 새 생명이 피어나고 있다. “일생에 이렇게 환한 날이 며칠이나 되겠는가.” 지난날을 돌아보며 삶이 그래도 행복했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 순간 “깜빡 졸았던가? 한평생이 그새 또 지나갔던가?” 다시 또 봄을 만날 수 있으려나? 인생무상을 읊조린다. 봄날은 그렇게 잠시 반짝거릴 뿐이라고.

구명숙 숙명여대 명예교수  k9350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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