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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세계여성의 날과 9·1 여권통문의 날
황인자 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젠더국정연구원 대표 | 승인 2023.03.16 09:33

[여성소비자신문=황인자 칼럼] 해마다 3월 8일이면 세계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을 맞는다. 그런데 우리는 양성평등기본법을 개정하여 2019년부터 3월 8일을 여성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민간에서는 3월 8일을 ‘세계여성의 날’로 기려 왔다. 이날이면 지구촌 여성단체들은 곳곳에서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펼친다.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 배경

세계여성의 날의 배경에는 보통 여성들이 만들어낸 역사가 있다. 남성과 동등하게 사회에 참여하고자 하는 여성의 수 세기에 걸친 노력의 역사에는 고대 그리스에서 전쟁을 종식 시키기 위한 아테네 여성 리시스트라테의 대 남성 투쟁이 있었으며, 자유·평등·박애를 주창하는 프랑스 혁명의 한 가운데 여성의 참정권을 요구하는 파리 여성들의 베르사유 행진이 있었다. 세계여성의 날의 발상은 20세기 초 미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엔의 공식 자료에 의하면 1909년 당시 미국의 소수정당인 사회당은 1908년 뉴욕의 의류업계 여성 근로자들이 열악한 근로조건에 저항하는 시위를 벌였던 것을 기려 2월 28일을 여성의 날로 기념하기 시작한 이래 1913년까지 매년 2월 마지막 일요일을 여성의 날로 기념하였다. 특정한 날을 지정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 와중에 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대회에서는 여성의 권리와 자유, 보통선거권을 보장받기 위해 여성의 날을 두기로 했다. 그러나 특정한 날을 지정하지는 않았다. 그 이듬해 덴마크를 비롯하여 오스트리아, 독일, 스위스 등지에서 최초로 여성의 날을 기념하여 3월 19일 여성의 선거권, 피선거권, 노동권 등을 요구하는 시가행진을 가졌다.

그리고 며칠 후 뉴욕시 화재로 140여 명의 여성 근로자들이 사망하는 참변이 일어났다. 사망자는 대부분 이탈리아계나 유대계 이민 여성들이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에서 노동입법이 촉발되고 세계여성의 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한편, 러시아 여성들은 1913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평화운동의 일환으로 2월 마지막 일요일을 여성의 날로 처음 기념했다. 이 무렵 유럽지역의 여성들은 3월 8일경 전쟁에 항의하고 여성연대를 공고히 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그러다가 1917년 2백만 명이나 되는 러시아 병사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에 자극을 받아 러시아 여성들은 정치지도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월 마지막 일요일을 ‘빵과 평화 시위의 날’로 삼아 거리에 나섰다.

그리고 사흘 후 제정 러시아는 몰락하고 과도정부가 들어서 마침내 러시아 여성에게 투표권을 허용하기에 이른다. 이 역사적인 날은 그레고리력으로 3월 8일이었다. 그 후 세계여성의 날은 통상 3월 8일로 기념되고 있다.

이렇게 사회주의에 뿌리를 둔 세계여성의 날은 점차 이념을 떠나 민간 차원에서 여성의 권리 장전 역사에 용기와 결단을 실행한 보통 여성들을 기리는 날로 변모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여성의 날은 선진국, 개도국을 막론하고 여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던져준다.

이날은 초창기에는 여성의 권리와 정치참여를 요구하는 시위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점차 세계여성의 날은 여성의 권리사에 있어서 보통 여성들의 비범한 역할을 기리는 행사로 변모하고 있다.

스위스의 평범한 주부들이 세계여성의 날에 가사노동 파업을 감행하는가 하면, 미국에서는 어머니들이 총격 사고로 숨진 아이들을 기려 가두행진에 나서기도 했다. 세계여성의 날에는 대통령이나 총리가 여성 각료에게 꽃을 선물하기도 하고, 여성동반 가족우대 문화프로그램을 선보이기도 한다.

우리의 경우 3·8 세계여성의 날은 1925년경 한반도에 상륙한 이래 남한에서는 해방 후 좌익운동의 하나로 치부되며 사라졌다가 1985년부터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최하는 세계여성의 날 기념 한국여성대회를 계기로 부활되었다. 북한에서는 이날을 ‘국제부녀절’이라 하여 공휴일로 정해 여성을 위한 명절로 크게 기념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 창립 이후 여성의 해방이 완성됐다고 주장하는 북한에서는 여성들을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로 내세우며 혁명과 건설에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해 온바, 여성들이 다산할 것을 비롯하여 혁명적 군인가정 건설, 사회주의 생활 기풍 확립에 솔선수범할 것 등을 적극 독려해 오고 있다. 이날은 각종 축하 공연과 행사가 열리며 남성은 여성에게 꽃다발을 선물한다.  

유엔도 1975년 ‘세계여성의 해’를 계기로 3·8 세계여성의 날을 기념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3월 8일을 세계여성의 날로 공식 결의한 것은 아니다. 1977년 유엔 총회 결의는 “각국이 자국의 역사와 전통, 관습에 비추어 1년 중 의미 있는 날 하루를 정해 여성의 권리와 세계평화를 위한 유엔의 날로 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 하루가 3월 8일이라고 못 박진 않았다. 유엔본부에서는 매년 3·8 세계여성의 날을 기념하여 조촐한 세미나가 열리고, 유엔사무총장의 기념 메시지가 발표된다. 올해 유엔이 정한 세계여성의 날 주제는 ‘디지털 세상: 양성평등을 위한 혁신과 기술’이다.

전 세계적으로 인공지는(AI) 분야에서 일하는 근로자 중 여성은 22%에 불과하고 전 산업을 통틀어 133개 AI 시스템 중 44%가 여성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고 있고, 125개국의 여성 저널리스트들 중 73%가 일하는 과정에서 온라인 폭력을 경험했다는 분석을 토대로 나온 메시지이다.

9월 1일 여권통문의 날 의의

우리 한국정부는 1975년 ‘세계여성의 해’를 맞아 여성단체들과 함께 ‘한국여성의 해’ 선포식을 가졌다. 그 이후 1995년 제정된 여성발전기본법의 정신을 이어받은 양성평등기본법에 “3월 8일을 여성의 날로” 한다는 규정을 신설(2018.3.2.)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여성사학회 등을 중심으로 비판이 터져 나왔다. 한국의 전통과 역사에 비추어 아무런 의미가 없는 3월 8일을 국가가 나서서 우리나라 여성의 날로 삼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서구 사회보다 10여 년 앞선 19세기 말 한국에서는 여성의 교육권과 직업권과 참정권을 주장하는 여성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1898년 9월 1일 한양의 북촌마을에서 리 소사, 김 소사 등 평범한 부인네 수백 명은 여성의 권리를 담은 여권통문(女權通文)을 발표하였다.

당시 독립신문,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 언론에서는 경천동지할 일이라고 대서특필했다. 여권통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권리선언문이다. 여권통문이 발표된 지 12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정부는 양성평등기본법을 개정(2019.11.26.)하여“매년 9월 1일을 여권통문의 날로” 기념하기로 했다. 늦었지만 다행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25년 전인 1898년 9월 1일 서울의 북촌 한옥마을에서 부인네들 수 백 명이 여성의 권리를 발표하고 사발통문을 돌렸다. 이름하여 ‘여권통문(女權通文)’.

“이왕에 우리보다 먼저 문명 개화한 나라들을 보면 남녀가 동등권이 있는지라. 어려서부터 각각 학교에 다니며 각항 학문을 다 배워 이목을 넓혀 장성한 후에 사나이와 부부지의를 맺어 평생을 살더라도 그 사나이에게 일호도 압제를 받지 아니하고 후대함을 받음은 다름 아니라 그 학문과 지식이 사나이와 못지않고 권리도 일반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오.”(여권통문 중에서)

남녀의 동등한 권리, 특히 배움의 권리를 아름답다고 선언한 여권통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선언문으로서 한국의 근대적인 여성운동의 효시로 평가된다.

여권통문의 정신을 가장 먼저 구체화한 것은 여권통문 선언 이후 찬양회(贊揚會)의 조직과 순성여학교(順成女學校)의 설립이다. 최근 찬양회와 순성여학교 설립을 결의한 집터가 밝혀져 기념 표석을 세울 수 있었다. 순성여학교는 우리 대한의 보통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찬양회에서 설립한 최초의 여학교라는데 그 의의가 있다.

여성도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다, 여성도 직업을 가지고 일하고 싶다, 여성도 정치에 참여해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보통 여성들의 간절한 꿈을 담은 여권통문은 여성의 참정권, 직업권, 교육권 등 3가지 권리를 주창했다.

“전일 해태하던 구습은 영영 버리고 각각 개명한 신식을 좇아 행할 새 사사이 취서되어 일신우일신함은 사람마다 힘쓸 것인데 어찌하여 우리 여인들은 일향 귀먹고 눈먼 병신 모양으로 구습에만 빠져 있는가.”(참정권)

“혹시 이목구비와 사지 오관 육체가 남녀가 다름이 있는가? 어찌하여 병신 모양으로 사나이의 벌어주는 것만 앉아서 먹고 평생을 심규에 처하여 남의 절제만 받으리오.”(직업권)

“이제는 옛 풍습을 전폐하고 개명진보하여 우리나라도 타국와 같이 여학교를 설립하고 각각 여아들을 학교에 보내 각항 재주를 배워 장차 여중군자들이 되게 하려고 방장 여학교를 창설하오니...”(교육권)

여권통문이 발표되자 당시 언론의 반응은 놀라왔다. 황성신문은 “하도 이상하고 신기하여 우리 논설 대신 여권통문 전문을 싣노라”고 국민에게 알렸다. 독립신문은 전원국 이전비와 구주로 파견하는 사신들의 비용과 양지아문에서 쓰는 비용과 급하지 않은 군사에 쓰이는 비용 등을 절약하여 통문에 나타난 여학교 설립을 후원해 줄 것을 주장했다. 제국신문은 이렇게 쓰고 있다.

“북촌서 부인네들이 여학교 설시할 뜻으로 리 김 두 소사가 입학권면하는 말과 학교설시하는 주의로 통문을 지어 돌렸다는 말까지는 본 신문에 이왕 내었거니와...들은 즉 이 일 주선하는 부인네가 이 뜻을 의론한지가 임의 오래셔 합의한 자이 거의 삼백여 인이라 하니 참 감사한 일이어니와...”

한편, 사회적으로도 긍정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황현은 그의 문집 <매천야록>에서 “북촌 부녀들이 여제자를 모집 입학케 하고 발문 윤고하여 남녀동권을 얻고자 한다.”고 평하였다.

1898년 북촌에서 쏘아올린 공 ‘여권통문’은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켜 국채보상운동과 1919년 3·1운동으로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 애국·애족에는 남녀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강력한 평등 여권 사상을 내세우며 여성들이 힘차게 일어났다. 김마리아를 비롯하여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여성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스스로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앞장섰다.

1898년 발표된 여권통문의 정신을 존중하여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 헌장에 남녀평등을 천명하였다. 이를 실천하고자 1922년 임시의정원에 여성 대의원을 탄생시킨 것은 그 의미가 각별하다. 황해도 출신의 김마리아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원인 셈이다.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헌법은 여성의 교육권과 노동권과 참정권을 보장하였다. 특히 참정권에 있어서는 서구 여성들이 권리를 쟁취한 것과 달리 한국여성의 권리는 격렬한 투쟁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우리 여성의 날은 3월 8일이 아닌 9월 1일로 해야

우리나라에서도 3·8 세계여성의 날에 여성단체들이 기념행사를 열어 왔다. 그러나 민간단체가 자발적으로 기념하는 것과 국가가 법정기념일로 지정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양성평등기본법은 세계여성의 날 “3월 8일을 여성의 날’로 규정하고 이와 동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권리선언문이 발표된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9월 1일을 여권통문(女權通文)의 날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실상 여성의 날이 두 개 있는 셈이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의미가 있는 우리 여성의 날은 3월 8일이 아니라 9월 1일이어야 한다. 3월 8일은 세계여성의 날로, 9월 1일 여권통문의 날은 우리 여성의 날로 삼아야 될 것이다. 정작 양성평등주간은 여성의 날인 3월 8일부터 1주간이 아니라 여권통문의 날인 9월 1일부터 1주간으로 한다는 양성평등기본법 시행령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올해가 여권통문 125주년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우리 여성단체들은 다양한 기념행사를 펼쳤다. 여기에 정부는 여성가족부 장관 명의로 ‘3·8 여성의 날’ 기념 메시지를 내놓았다.

황인자 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젠더국정연구원 대표  eqhwa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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