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소비자신문] 그리움이 눈처럼 쌓인 거리를

나 혼자서 걸었네 미련 때문에

흐르는 세월 따라 잊혀진 그 얼굴이

왜 이다지 속눈썹에 또다시 떠오르나

정다웠던 그 눈길 목소리 어딜갔나

아픈 가슴 달래며 찾아 헤매이는

가을비 우산 속에 이슬 맺힌다

잊어야지 언젠가는 세월 흐름 속에

나 혼자서 잊어야지 잊어봐야지

슬픔도 그리움도 나 혼자서 잊어야지

그러다가 언젠가는 잊어지겠지

정다웠던 그 눈길 목소리 어딜갔나

아픈 가슴 달래며 찾아 헤매이는

가을비 우산 속에 이슬 맺힌다

 

가을의 끝자락이다. 이맘때 비라도 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최헌(1948∼2012년)의 히트곡 ‘가을비 우산 속’이다. 이두형이 노랫말을 짓고 백태기가 작곡했다.

7080세대를 포함한 중년층 이상이면 귀에 익은 가요다. 서정성 짙은 가사, 애잔한 멜로디가 어우러진 가을의 명곡이다. 1990년대만 해도 비 내리는 가을날이면 레코드가게들이 단골 곡으로 틀어줬던 기억이 난다.

최헌의 제4집 음반 머리 곡

‘가을비 우산 속’은 1978년 12월 최헌의 제4집 음반 첫 곡으로 실려 공식 발표됐다. 이 노래는 이별의 정한(情恨)을 가을비에 기대 읊었다. 비 내리는 어느 가을날 잊힌 얼굴을 떠올리며 그 옛날 추억에 가슴 아파한다는 내용이다.

봄비가 만물을 되살리는 단비라면 가을비는 겨울을 손짓하는 눈물이랄까. 노랫말에 그리움과 애잔함, 아픔이 배어있다. 비 내리는 거리는 헤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이 눈처럼 쌓여있는 곳으로 표현돼 있다.

사랑했던 사람을 그리며 가을비 내리는 거리를 하염없이 걷는 모습은 노래를 듣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최헌은 정다웠던 그 눈길과 목소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허스키한 음성으로 흐느낀다. 4분의 4박자, 슬로우고고 리듬으로 가사내용과도 맞아떨어진다. 

‘가을비 우산 속’은 1977년 최헌이 처음 불렀다. 그룹밴드가수(보컬리스트)였던 그가 그해 솔로가수가 돼 이 노래를 불러 이름이 크게 알려졌다. 그가 그룹에서 나와 홀로서기를 한 건 시대흐름이었다.

그룹사운드 전성기였던 1970년대 록그룹 보컬출신가수들이 발라드곡 등을 많이 불렀다. 최헌도 그랬다. 그룹사운드시절 익힌 록 창법으로 트로트리듬이 접목된 이 노래를 불러 빅히트한 것이다. 감성적인 노랫말, 부드러운 멜로디, 매력적인 목소리가 기차게 맞았다. 갈라지는 듯한 독특한 그의 음색 또한 잘 어울렸다. 

최헌에겐 시대 운도 따랐다. 1970년대 중반 대마초사건으로 국내 가요계가 쑥대밭이 됐을 때 그는 살아남았다. 그의 솔로가수 데뷔곡 ‘오동잎’(안치행 작사·작곡)이 대중의 입맛에 맞춘 노래라면 ‘가을비 우산 속’은 음악적으로 한 단계 발돋움한 가요다. 최헌은 1978년 MBC 가수왕, TBC 가요대상 최고가수상을 받는 등 유명해졌다. 

우연한 기회에 작곡…1년도 안돼 수상

이 노래는 우연한 기회에 작곡됐다. 어느 날 작곡가 백태기가 작사가 이두형의 집에 가게 됐다. 이 작사가는 그에게 ‘가을비 우산 속’ 노랫말을 주며 작곡을 부탁했다. 백 작곡가는 음악적 영감이 떠오르긴 했으나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이 작사가가 백 작곡가 집을 찾아가 “곡이 나왔느냐?”고 물었다. 백 작곡가는 자존심에 “곡이 있다”며 거짓말을 하고 즉흥적으로 흥얼거렸다. 그는 이 작사가가 떠난 뒤 악상을 떠올려 후다닥 작곡했다. 졸지에 ‘가을비 우산 속’ 멜로디가 만들어진 것이다. 운명 같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는 발표 1년이 안 돼 상복이 터졌다. 백태기 작곡가가 1979년 작곡부문 대상(大賞)을 받고 우리나라 대중음악거장으로 떴다. 프로작곡가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

그는 2013년 7월 제주지역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래작곡에 얽힌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작곡한 그해 작곡상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기적 같다. 노래가 그렇게 빨리 히트할 줄 몰랐고, 오랫동안 사랑 받을 줄도 몰랐다. 감사할 뿐이다.”

노래가 히트하면서 이후 여러 가수들이 리메이크해 불렀다. 1979년 희자매, 1984년 조영남-김도향이 함께 부르기도 했다. 혜은이 등이 방송에서 부른 버전들도 있다.

같은 제목의 영화도 나왔다. 1979년 8월 석래명 감독이 만든 ‘가을비 우산 속에’는 서울 종로 3가 단성사와 부산 제일극장에서 개봉, 흥행에 성공했다. 단성사 앞엔 ‘전회 매진사례’ 표지판을 세웠을 만큼 인기였다. 서울에서만 16만명이 봤다.

영화엔 국내 최고배우였던 신성일과 정윤희가 주연으로 나왔다. 빨간 비옷을 입은 정윤희와 노란색 우비의 김자옥이 마주보고 있는 영화포스터도 눈길을 끌었다. ‘가을비 우산 속’ 노래 또한 인기의 날개를 달았다. 최헌이 주제곡(OST)을 부르면서 영화와 함께 뜬 것이다. 

백태기(79) 작곡가는 전주 부잣집에서 8남매의 일곱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경희대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한 뒤 미국으로 가서 음악을 공부했다. ‘건반 위의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그는 제주에 산다. 제주생활은 음악열정을 새롭게 불사르게 된 계기가 됐다.

그는 1990년대까지 미국, 홍콩, 일본을 오가며 영화음악과 CM송 등을 작곡하며 유명해졌다. 1996년 국내로 돌아와 음악 삶에 열심이었다. 그러던 중 1998년 KBS교향악단장 제의를 받았으나 ‘외환위기(IMF사태)’로 물거품이 됐다.

우울증으로 음악에서 손을 놓고 시름을 털기 위해 제주도로 옮겼다. 제주시 연동에 ‘백태기 실용음악학원’을 열고 제2의 음악 삶을 펼친 것이다. 재즈피아니스트이기도 한 그는 여러 장르의 노래 500여곡을 작곡했다. 생활공동체협동조합 ‘혼디모영’ 주제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제주도로 오는 이주민들을 위해 토착민들이 도움을 준다는 취지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식도암 투병 중 2012년 9월 별세

가수 최헌도 이야기가 많은 음악인이다. 1948년 3월 12일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난 그는 생후 3개월이던 1948년 6월 파주로 와 서울로 이사했다. 명지대 경영학과에 다니던 그는 1967년 록그룹인 차밍 가이스(Charming Guys) 기타연주자 겸 보컬리스트로 대중음악계에 발을 디뎠다.

미8군 무대에서 음악활동을 시작, 1970년 전국보컬그룹 경연대회 1등을 한 뒤 이듬해 록 밴드 ‘히식스’(He6)의 보컬리스트로 들어갔다. 기타리스트 김홍탁, 가수 조용남이 이끈 ‘히식스’는 노래 ‘초원의 빛’ 등이 히트하면서 인기그룹이 됐다.

최헌은 1974년 7인조 음악그룹 ‘검은 나비’를 결성, ‘당신은 몰라’를 발표했다. 1976년엔 그룹 ‘호랑나비’를 만들어 ‘오동잎’을 히트시켰다. 1977년 솔로가수로 홀로서기 한 최헌은 그룹사운드 부활을 노리며 그룹 ‘불나비’를 만들었다.

1983년 미국 버티 히긴스의 팝송 번안곡 ‘카사블랑카’를 발표, 히트했다. 그러나 건강문제가 생겨 오래 가지 못했다. 식도암으로 투병 중 2012년 9월 10일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향년 65세. 

그가 남긴 명곡이 많다. ‘구름 나그네’, ‘가수의 어느 날’, ‘바람개비’, ‘잎새의 노래’, ‘울다 웃는 인생’, ‘순아’, ‘앵두’, ‘당신은 몰라’ 등 수두룩하다.

올 10월 8일 오후 서울 대학로 한예극장에선 ‘최헌 10주기 추모음악회’가 열렸다. 고인의 음악을 재평가, 추모하는 자리로 동료, 선・후배음악인들이 모였다. 술 좋아하고 인간적이었던 고인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작사가 이두형, 시나리오작가로 활동

노랫말을 쓴 이두형은 196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꽃과 병정’이 당선,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영화시나리오를 쓰며 작가로 활동했다. 1965년 김응천 감독의 ‘청춘을 변상하라’(1965년)로 시나리오작가가 됐다.

1966년 그가 각본을 맡은 이만희 감독의 ‘시장’(1966년)이 청룡상에서 7개 부문 상을 받으며 각광받았다. 1968년 한해에 18편의 각본을 썼을 만큼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이만희 감독과 많은 영화작품을 만들었다.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찍은 이 감독 영향으로 멜로물, 액션물, 코미디물, 문예물 등의 시나리오를 쓸 수 있었다. ‘노병과 영웅’(TBS), ‘난 바다가 미워’(KBS) 등 TV드라마 시나리오도 썼다. 1970년대엔 외국합작영화 붐을 타고 홍콩으로 나가기도 했다.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이사를 지낸 그는 2007년 3월 20일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왕성상 언론인/가수  wss4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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