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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戰死)한 동생 떠올리며 만든 대중가요 ‘전우가 남긴 한 마디’북한출신 음악인 전오승 작사/작곡, 1976년 허성희 데뷔곡, 군인들 애창···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방송 타고 빅히트, 같은 제목 영화 1979년 개봉
왕성상 언론인/가수 | 승인 2022.06.10 16:23

[여성소비자신문] 생사를 같이 했던 전우야 정말 그립구나 그리워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 정말 용감했던 전우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정의에 사 나이가

마지막 남긴 그 한마디가 가슴을 찌릅니다

이 몸은 죽어서도 조국을 정말 지키겠노라고

 

전우가 못다 했던 그 소망 내가 이루고야 말겠소

전우가 뿌려놓은 밑 걸음 지금 싹이 트고 있다네

우리도 같이 전우를 따라 그 뜻을 이룩하리

마지막 남긴 그 한 마디가 아직도 쟁쟁한데

이 몸은 흙이 되도 조국을 정말 사랑 하겠노라고

6월은 ‘보훈의 달’이다. 이맘때면 군인, 전쟁에 얽힌 노래들을 자주 들을 수 있다. 특히 6·25전쟁관련 곡들이 방송전파를 탄다. 대부분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들이다. 1976년 발표된 ‘전우가 남긴 한 마디’도 그 중의 하나다. 여가수 허성희의 데뷔곡으로 노랫말이 가슴을 저민다. 전쟁이 낳은 일종의 통곡(痛哭)이자 살아남은 자의 비가(悲歌)에 가깝다.

국군묘지 갔다 온 날 밤 진혼곡으로 만들어져

이 노래엔 에피소드가 많다. 작사·작곡가 전오승(1923년 3월 16일~2016년 7월 3일/본명 전봉수)이 동생(전기승)이 잠든 국군묘지를 갔다 온 날 밤에 만들어졌다. 전오승 동생은 6·25전쟁 때 전사했다. 북한에서 온 그의 가족은 서울에 삶의 터를 잡았다.

전기승은 6·25전쟁에 나가 머리와 다리를 다쳤다. 수술을 받은 그는 마냥 군병원에 있을 수 없었다. 전우애로 뭉친 동료들이 그를 불러 다시 전쟁터로 나갔다. 북진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 개입으로 공방을 거듭했다. 살인적인 추위,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무척 힘들었다.

적과 싸우던 전기승은 전우를 구하려다 끝내 숨졌다. 동생의 전사통지를 받은 그의 형 전오승은 망연자실했다. 동생의 장렬한 죽음 앞에 울 수도 없었다. 세월이 갈수록 한이 맺혔다.

전 씨 가족은 미국이민을 결정했다. 그러나 국군묘지에 묻힌 동생을 두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 씨는 어느 날 국군묘지를 찾았다. 동생의 넋을 달래며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전오승은 노랫말을 쓰고 곡을 붙였다.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음악으로 풀어낸 것이다.

노래는 그리운 동생과 6·25전쟁 참전용사들 진혼곡이 됐다. 전오승은 작사·작곡을 하며 엄청 울었다. 과묵한 성격이지만 눈물이 쏟아졌다. 노랫말이 말해주듯 참전용사들은 ‘전쟁터에 핀 꽃’이자 ‘평화의 나팔수’였다. 전오승의 동생도 그랬다.

이 노래는 대통령 지시로 단숨에 히트한 곡으로도 유명하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전오승은 1975년 월남이 패전하면서 여파가 우리 쪽에 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예비군 증강, 북한의 대남도발 가능성 정보도 있었다.

군인들 애국심을 담은 가요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작사·작곡한 노래악보를 무명의 신인가수 허성희에게 줘 연습시켰다. 이어 잘 아는 음반제작자 박웅 사장(웅석흥업 대표)에게 허성희의 노래연습테이프를 들려줬다. 반응이 좋아 음반제작에 들어갔다.

가사가 군 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멜로디도 탱고풍이라 성공을 예감했다. 음반이 나오자 박 사장은 방송사를 돌며 신곡홍보에 나섰다. 그러나 방송을 타지 못하고 레코드재고만 쌓여갔다. 박 사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군가는 많으나 군 관련가요가 없다는 걸 알고 꾸준히 노래를 알렸다. 어느 날 그는 군 연예대 후배 허참(1949년 11월 30일~2022년 2월 1일)을 찾아가 하소연했다. 허참은 “육군본부 정훈참모에게 음반을 갖다 주라”고 했다. 연예대 근무시절 윗사람이었던 정훈참모를 만난 박 사장은 귀가 번쩍 터였다. “노래 좋네. 레코드 5백장만 줘봐.” 며칠 뒤 “공짜라 그런지 잘 팔리네. 1천장만 더 줄래!” 음반에 반응이 왔다는 소리다.

“각하가 좋아하는 노래이니 신경 좀 쓰시오!”

노래가 군에서 인기를 얻자 청와대에 보고됐다. 박 대통령은 비서를 불렀다. “요즘 군에서 이상한 노래가 유행한다며? 음반 좀 가져와봐!” 노래를 들은 박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공부장관 좀 들어오라고 그래!”. 장관은 대통령이 왜 불렀는지 궁금했다. “요즘 좋은 노래가 나왔는데…. 임자, 아는가?”, “글쎄요. 혹시…, 총알이 빗발치는…”, “알긴 아는구먼, 그런데 왜 방송에 안 나와?”, “조치하겠습니다!’. 장관은 곧바로 방송사사장들을 불렀다. “각하가 좋아하는 노래이니 신경 좀 써시오!”

때마침 6월이 됐다. 방송사사장들은 TV쇼 담당부장에게 ‘전우가 남긴 한 마디’를 내보내고 가수를 출연시키도록 했다. 허성희는 남대문시장에서 산 예비군복에 명찰을 달고 군화 신은 모습으로 방송무대에 섰다. 한 번의 출연이었지만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다음날 음반회사 앞엔 현금을 갖고 몰려든 트럭들이 줄을 섰다. 제작자 박 사장은 공급이 달려 피해 다니는 몸이 됐다. 대박이 난 것이다. 허성희는 1978년 동양방송(TBC) 방송가요대상 신인여가수상 후보, 전오승은 작사부분 후보로 뽑혔다.

‘전우가 남긴 한 마디’는 음반을 재발매했을 만큼 6월이면 애창되는 전쟁가요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작사·작곡자 전오승은 박 대통령의 군사독재가 싫어 미국으로 이민 가버렸다.

노래가 히트하자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1979년 4월 20일 개봉됐다. 이원세 감독 작품으로 전오승의 딸(전영선)이 출연, 눈길을 모았다. 6·25전쟁 때 공방이 가장 치열했던 전술상의 요지 598고지에서 국군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다. 전쟁을 배경으로 인간본연의 진솔함을 담아낸 감독의 주제의식이 돋보인다. 제15회 백상예술대상, 제15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에서 영화부문 대상, 작품상, 시나리오상을 받았다.

전오승은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아버지 전상연, 어머니 장중차 씨 사이의 5남4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1939년 진남포실천상업학교를 졸업, 홀로 월남해 서울 마포에 둥지를 틀었다. 서대문에 있던 작곡가 조두남의 집을 드나들며 화성악을 배웠다.

정동방송국(HLKA) 경음악단 전속 기타연주자로, 중앙방송국에선 콘트라베이스연주자 겸 작곡가로 활동했다. 여동생인 가수 나애심(본명 전봉선)이 부른 ‘밤의 탱고’, ‘과거를 묻지 마세요’ 등을 작곡했다. ‘과거는 흘러갔다’, ‘이별의 인천항’, ‘방랑시인 김삿갓’, ‘백마야 우지마라’, ‘효녀심청’, ‘장희빈’, ‘경상도 청년’, ‘휘파람 불며’, ‘푸른 날개’, ‘인도의 향불’, ‘미사의 종’, ‘아리조나 카우보이’ 등 명곡들을 남겼다. 그는 노랫말도 썼다.

작사가 예명은 ‘세고석(世鼓石)’, ‘세고천(世鼓千)’. 그는 ‘전우가 남긴 한 마디’를 끝으로 음악 삶을 접고 1980년대 초 큰딸이 사는 로스앤젤레스(LA)로 떠났다. 그의 집안엔 연예인이 많다. 딸 전영선은 영화배우, 여동생 나애심은 가수 겸 영화배우, 조카 김혜림(나애심의 딸)은 가수다. 그는 생전에 낚시광으로 동아방송(DBS)에서 낚시해설을 하기도 했다.

허성희, 미국서 돌아와 ‘독도찬가’ 발표

가수 허성희(1958년생)는 1972년 ‘앵무새’로 가요계에 발을 디뎠다. 그 후 9인조 혼성밴드에서 노래를 부르며 무명가수생활을 하다 ‘전우가 남긴 한마디’로 인기가수가 됐다. 1977년 7월에 낸 ‘허성희의 독집음반’(성음제작소 발매)에서 전오승이 작곡한 12곡 중 머릿곡 ‘전우가 남긴 한마디’가 빅히트해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백마’, ‘진정’, ‘마음에 새겨진 결심’, ‘영광의 길’, ‘기타를 팅기며’, ‘내님이 오네’, ‘멈추지 않는 사랑’ 등을 취입했다.

그는 1979년 갑자기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교로 옮겨 옷가게매니저, 세일즈우먼 등으로 일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초대형 라이브클럽을 차려 매일 무대에 올라 본고장 음악인들과 재즈, 힙합곡들을 불렀다.

2013년 귀국해선 디스코풍의 ‘독도찬가’(손기복 작사, 임정호 작곡)를 발표했다. 그의 아버지(허양렬 1920년 12월 9일~2019년 6월 25일)는 참전용사다. 6·25전쟁 때 화천지역 육군 제7사단 소속으로 공을 세웠다. 백선엽 장군과도 군 생활을 같이했다. 평남 풍화군 충덕면 구읍리 태생으로 제대 후 1953년 결혼, 1녀1남(허성희, 허태수)을 뒀다. 

왕성상 언론인/가수  wss4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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