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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극작가 작사, 영국음악가 작곡한 세계적 히트송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미국 남북전쟁 때 노래 연주되자 남군/북군 합창, 24시간 휴전하기도···우리나라에선 김재인 씨 번안, 같은 제목 드라마/소설/웹툰 등도 인기
왕성상 언론인/가수 | 승인 2022.05.26 08:28

[여성소비자신문]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집 내 집뿐이리

 

고요한 달빛도 창 앞에 흐르고

내 푸른 꿈길도 내 잊지 못해

저 맑은 바람아 가을이 어데뇨

벌레 우는 곳에 아기 별 뜨네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집 내 집뿐이리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가정은 행복의 터전이요 둥지이자 쉼터다. 영어단어 중 하늘(Heaven), 어머니(Mother), 가정(Home)이 가장 아름다운 말로 꼽힌다. Home은 집 건물을 나타내는 House와 개념이 다르다. Home은 소중하고 평온한 안식처지만 House는 밖으로 드러난 건물일 뿐이다.

작곡 먼저 되고 작사 이뤄져

이맘때면 세계적 히트애창곡 ‘즐거운 나의 집’이 자주 불린다. 원제목은 ‘홈 스위트 홈(Home Sweet Home)’. 세계적 명곡이자 지구촌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다. 어느 나라에 가도 이 노래 선율을 들을 수 있다. 미국사람들이 가장 사랑하고 자랑한다. 삶의 바탕이 되는 가정의 행복을 노래하고 있어서다.

이 노래는 미국극작가이자 배우․기자였던 존 하워드 페인(John Haward Payne/1791년 6월 9일∼1852년 4월 10일) 작사, 영국작곡가 겸 지휘자 헨리 비숍(Bishop, Henry Rowley/1786년 11월 18일~1855년 4월 30일)이 작곡했다. 비숍이 이탈리아 시실리안 민요(Sicilian Air)에서 영감을 받아 곡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즐거운 나의 집’은 작곡이 먼저 되고 작사는 뒤에 이뤄졌다. 처음엔 멜로디만 있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1823년 공연된 오페라 ‘클라리, 밀라노의 아가씨’(Clari, The Maid of Milano)에 노랫말이 소개되면서 히트곡이 됐다. 악보가 10만장이나 팔렸다. 그때로선 엄청난 양이다. 2부 합창곡으로도 불려 대중에게 파고들었다.

노랫말은 존 하워드 페인이 30대 초반 프랑스 파리에 머물 때 만들어졌다. 한 푼 없는 처량한 빈털터리 신세였을 때다. 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집도 없이 떠돌았다. 13살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부터 그에겐 집이 없었다. 그는 추운 어느 겨울날밤 길을 걷다 불 켜진 창문을 통해 단정한 커튼이 쳐진 거실에 둘러앉자 있는 가족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게 됐다. 그 순간 고향의 부모형제가 그리워 견딜 수 없었다.

“나에게도 저런 가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울먹울먹한 감정으로 노랫말을 썼다. 노래서문에서 그는 “이 세상의 쾌락과 궁전 가운데로 내가 돌아다닐지라도 나를 언제나 겸손케 하는 것은 내 집 같은 곳이 다시없다”고 썼다. 원문가사는 5절까지 돼있다.

우리나라 음악교과서에도 실려

이 노래는 존 하워드 페인이 대본을 쓰고 헨리 비숍이 작곡, 1823년 공연된 오페라 ‘클라리, 밀라노의 아가씨(Clari, The Maid of Milan)’에서 소개됐다. 이때 극음악으로 쓰이면서 제대로 된 노래형태를 갖췄다.

미국남북전쟁 때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과 특히 그의 부인이 좋아했던 곡이기도 하다. 링컨대통령은 아들이 11살 때 열병으로 숨지자 백악관에서 이 노래를 반복해 연주해달라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862년 오페라가수 아델리나 패티(Adelina Patti, 1843∼1919년)가 대통령 초청을 받아 백악관에서 부르기도 했다.

노래가 히트하자 ‘Home Sweet Home’ 문구의 자수가 인기였다. 집과 백악관 등에 장식되기도 했다. 미국 가정에선 군에 간 아들을 그리워하며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길 비는 어머니들이 ‘Home Sweet Home’문구의 수를 놓아 아들방에 걸어놓았다.

다양한 매체, 작품 등에도 널리 쓰였다. 1939년작 영화 ‘오즈의 마법사’, 1944년작 영화 ‘비소와 낡은 레이스’, 1982년작 영화 ‘아미티빌의 저주’, 1988년작 일본 애니메이션영화 ‘반딧불의 묘’에 나온다.

우리나라에선 이 노래를 교사였던 김재인 선생이 한국어로 번안했다. 제목 ‘즐거운 나의 집’도 그가 붙인 것이다. 중학교 음악교과서에도 실렸다. 조수미, 조영남 등 많은 성악가와 가수들이 취입하기도 했고 자동차와 지게차 후진음, 하차벨 등으로도 쓰여 우리들 귀에 익숙하다. 현관초인종, 휴대전화컬러링, 오르골에 쓰이고 자장가로도 편곡됐다.

노래와 같은 제목의 드라마, 소설, 웹툰 등도 나왔다. 2010년 MBC-TV가 16부작으로 방영한 주중드라마(수․목요일 오후 9시55분) ‘즐거운 나의 집’은 그해 12월 23일 종영됐다. ‘장미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결혼 10년차 부부와 남편을 죽였을지도 모르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미스터리멜로물이다. 오경훈․이성준 연출, 유현미 극본, 장준호 조연출이 참여한 이 드라마는 한때 시청률이 10%(16회, 닐슨코리아)까지 나오기도 해 화제가 됐다.

“군인들 사기를 떨어뜨린다” 연주 금지

공지영의 장편소설 ‘즐거운 나의 집’도 있다. 폴라북스가 2013년 6월 14일 펴낸 이 소설은 외로운 사람을 위로해줄, 가슴이 따듯해지는 가족이야기를 담았다. 열여덟 살 주인공 위녕이 고교 3학년이 되기 전 10대의 마지막을 엄마와 보내는 내용이다.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한 엄마와 사는 위녕의 좌충우돌 유쾌한 이야기와 가족이기에 받아들여야했던 상처, 사랑이기에 거부할 수 없었던 고통 등을 작가특유의 문체로 보여준다. 가족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소중함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가족과 사랑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다. 웹툰 ‘즐거운 나의 집’은 노대주 작가가 펴낸 온라인만화로 성인물이다. 미스터리내용의 이 작품은 포털사이트 다음(Daum)을 통해 볼 수 있다.

‘즐거운 나의 집’은 1862년 미국 남북전쟁 때도 불려 이채롭다. 남북전쟁에서 북부연합군 1만2000명과 남부동맹군 5000명의 사상자를 낸 버지니아주의 레파하녹크 리버(Rappahannock River)전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때 양쪽 군사들은 강을 사이에 두고 맞섰다. 낮엔 서로를 공격해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숨졌으나 밤이면 다른 분위기였다. 군인들을 달래고 힘을 북돋워주기 위한 음악회가 매일 열린 것이다.

어느 날 밤 북군군악대가 ‘성조기의 노래’를 연주하자 남군군악대는 ‘딕시의 노래’로 대응했다. 이어 북부연합군밴드가 ‘Home Sweet Home’을 연주했다. 더욱이 한 병사의 하모니카연주는 군인들 가슴을 적셨다.

음악이 흐르자 남군군악대도 같은 노래를 연주했다. 음악소리에 고향을 그리워하던 군인들은 텐트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모두 밖으로 나와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선율은 강 건너 남부동맹군에게까지 전해져갔다.

고향, 부모, 가족,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던 군인들은 강을 헤엄쳐 서로가 적이란 사실을 잊은 채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손을 잡으며 ‘즐거운 나의 집’을 합창했다. 서로를 죽이며 맞섰던 이들은 조국과 동포애로 고향의 평화와 사랑을 느껴 24시간 휴전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종군기자 프랭크 막심은 “다들 미쳤다!”고 큰소리로 외쳤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전쟁이 이어지면서 이 노래는 군인들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연주가 금지되기도 했다.

작사가 존 하워드 페인의 기구한 삶

이 노래 가사를 쓴 존 하워드 페인의 기구한 삶도 눈길을 끈다. 떠돌이 삶을 살며 가정을 그리워하다 세상을 떠난 독신남이다. 자신이 태어난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 이스트햄턴에 있는 조그만 시골 오두막집의 추억과 따뜻한 보금자리를 애타게 그리워했다.

말년엔 가족도 없이 병든 몸으로 떠도는 나그네였다. 1842년부터 튀니스(튀니지 수도) 주재 미국영사로 10년간 지내며 1852년 4월 10일 아프리카의 후미진 길거리에서 숨졌다. 그는 웅변선생이었던 아버지의 가르침 덕에 유명배우가 돼 영국무대로 진출한 첫 미국연예인이기도 하다.

그는 객사하기 한 해전인 1851년 3월 3일 벗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가정의 기쁨을 자랑스럽게 노래한 나 자신은 아직껏 내 집이란 맛을 모르고 지냈으며 앞으로도 맛보지 못하고 말 것이오.” 그는 이 편지를 쓴 지 1년 뒤 삶을 마감했다.

그로부터 31년이 지난 1883년 그는 고국의 품에 안겼다. 미국정부는 “내게 돌아갈 가정은 없지만 고향 공동묘지에라도 묻히게 해 달라”는 존 하워드 페인의 유언에 따라 군함을 보내 유해를 본국으로 옮겼다. 유해가 뉴욕으로 오던 날 필라델피아부두엔 뉴욕시가 생긴 이래 최대인파가 몰렸다.

65명의 군악대 연주와 예포가 울려 퍼졌다. 유해는 뉴욕 맨해튼에서 다시 수도 워싱턴DC로 옮겨져 인파가 가득한 시내중심부 길을 퍼레이드하고 미국 제21대 대통령 체스터 아더(Chester A. Arthur), 국무위원들의 정중한 영접으로 워싱턴 오크힐 묘지(세인트 조지교회 공동묘지)에 묻혔다. 죽어서야 ‘집(묘지)’을 구한 셈이다. 묘엔 이렇게 쓰여 있다. ‘아름다운 노래로 미국을 건강한 나라로 만들어주신 존 하워드 페인, 편안히 잠드소서.’

반면 작곡자 헨리 비숍은 런던출신으로 영국에서 기사작위를 받고 옥스퍼드대 교수가 됐다. 부와 명예를 누리면서 평온하게 살아 작사가 존 하워드 페인과 대비된다.

왕성상 언론인/가수  wss4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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