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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의 한시산책] 이겼다고 이긴 것이 아니다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 승인 2021.07.26 17:37

[여성소비자신문] 당의 시인 조송(曺宋)은 황소(黃巢)의 난이 발발하자 전쟁으로 야기된 갖가지 참상을 보고 한 수의 시로 한탄했다. 모든 전쟁은 이유를 불문하고 미친 정치가들의 황당한 게임이다.

택국강산입전도(澤國江山入戰圖), 생민하계낙초소(生民何計樂樵蘇)?

빙군막어봉후사(憑君莫語封侯事),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

물의 날 강산이 전쟁 속에 빠졌으니,

살아남은 백성은 나무하고 풀이나 뜯어먹을까?

그대여, 제후가 되려고 하지 말게나,

장수 하나의 전공에 수많은 백골이 뒹군다네.

진(秦)이 전국시대를 마무리하고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장기판의 말처럼 전쟁을 이끌던 두 장군이 있었다. 역사는 그들을 명장이라고 평가한다. 진의 백기(白起)와 조(趙)의 염파(廉頗)이다. 전투라는 측면에서 이들이 명장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의 말처럼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전투와 전쟁은 다르다. 전투에서 이기고도 전쟁에서 진 명장들이 많다. 가장 비근한 사례로 맥아더를 꼽을 수 있다. 태평양전쟁과 이어서 발생한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는 결국 트루먼의 정치적 판단에 말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백기와 염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백기(白起)의 말로

BC259년, 장평에서 조군을 대파하고 40만명을 생매장한 진이 이어서 상당을 평정했다. 진은 군사를 나누어 왕흘(王齕)에게 지금의 산서성 익성현(翼城縣)의 동쪽 피뢰(皮牢), 사마경에게 태원(太原)을 공격하게 했다. 한과 조는 소대(蘇代)를 진의 범수(范睢)에게 파견했다. 범수를 만난 소대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무안군 백기가 마복군의 아들 조괄(趙括)을 사로잡았습니까?”

“그렇소.”

“곧 한단을 포위하겠군요?”

“그렇소.”

“조가 망하면 진왕은 왕자가 되고 무안군은 삼공(三公)이 되겠습니다. 무안군은 진을 위해 70여개의 성을 탈취했습니다. 옛날 주공(周公), 소공(召公), 여상(呂尙)보다 더 큰 공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의 지위는 무안공보다 낮아집니다. 진이 한(韓)을 공격하여 형구(邢丘)를 포위했을 때 위협을 느낀 상당의 군민들은 진에 투항하지 않고 조로 귀순했습니다. 천하의 백성들이 진에 투항하는 것을 꺼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진이 조를 멸망시키면, 북방은 연으로 귀순할 것이고, 동방은 제로 귀순할 것이며, 남방은 한으로 귀순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이 얻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문득 느끼는 바가 있던 범수는 진왕을 만나 이렇게 건의했다.

“지금 우리 군대는 너무 지쳐있습니다. 한과 조에게 일부의 땅을 받는 조건으로 강화하고 군사들에게 휴식을 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진왕의 허락을 받은 범수는 한으로부터 원(垣)과 옹(雍)을, 조로부터 6개의 성을 받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고 작전을 종결했다. 이 일로 백기와 범수의 사이가 나빠졌다.

BC258년 9월, 진의 오대부(五大夫) 왕릉(王陵)이 한단을 공격했다. 병에 걸린 백기는 출전하지 못했다. 왕릉이 성과를 얻지 못하자 이듬해 증원군을 파견했지만, 오히려 5명의 장수를 잃고 말았다. 진왕이 백기를 불러서 의견을 물었다. 백기는 사양했다.

“한단의 공략은 어렵습니다. 우리 진을 원망하던 제후들의 원군이 속속 한단으로 집결합니다. 장평에서 조군을 격파했지만, 우리도 엄청난 손실을 입었습니다. 나라를 비우고 강산을 넘어 다른 나라의 수도를 치는 것은 위험합니다. 조가 안에서 호응하고 제후들이 밖에서 공격하면 우리 군대는 패하고 말 것입니다.”

진왕이 다시 명령을 내렸지만 백기는 끝까지 사양하다가 마침내 병을 핑계로 자리에 눕고 말았다. 진왕은 결국 왕흘을 파견했지만 초의 춘신군과 위의 평원군이 수 십 만의 군사를 이끌고 진군을 공격하자 대패하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백기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말을 듣지 않다가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화가 난 진왕이 억지로 출전하라고 명했지만 백기는 꼼짝하지 않았다. 범수까지 나서서 지난 허물을 사과하며 출전하라고 권했지만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진왕은 백기를 사병으로 강등시키고 음밀(陰密)에 유폐시켰다. 3개월 후에 제후들의 연합군이 진군을 격파했다. 진왕은 백기를 함양에서 내쫓기로 결정했다. 서문을 나가 두우(杜郵)에 이르렀을 무렵 진왕이 보낸 사신이 달려와 칼을 주며 자결하라고 명했다. 죽기 전에 백기는 하늘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범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던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하고 결국 목을 찔러 죽었다.

“나는 죽어야 마땅하다. 장평에서 항복한 조의 군사 40만명을 속여서 생매장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죽기에 넉넉한 죄가 아닌가?”

백기는 AD257년 11월에 죽었다. 진의 백성들은 그의 억울함을 애석하게 여겨 곳곳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사마천은 백기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세상에는 자(尺)도 짧은 곳이 있고 치(寸)도 긴 곳이 있다고 한다. 백기는 적을 잘 간파하고 음기응변에 능하여 기이한 계책을 잘 활용했다. 그러나 범수가 자신을 노리는 것은 알지 못했다. 사람마다 누구에게나 단점은 있는 법이다.”

사마천의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이 있지만, 신기하게도 천적을 내는 것이 역사의 법칙을 넘는 자연의 법칙이다. 백기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이 있었지만, 그를 제어하는 정치적 능력을 지닌 범수라는 라이벌이 태어났다.

염파의 비극

한단의 포위가 풀리고 5년이 지난 후에 연(燕)이 조를 침공했다. 염파는 호(鄗)에서 연군을 격파하고 연장 율복(栗腹)을 죽였다. 조왕은 염파를 신평군(信平君)으로 봉하고 가상국(假相國)으로 임명했다. 지난날 염파가 장평에서 해임되었을 때 그의 곁을 떠났던 빈객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화가 난 염파가 그들을 내쫓으려고 하자, 그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어떻게 그 정도 판단력 밖에 없습니까? 대체로 천하의 평범한 인간들은 잇속에 따라 사귀는 것이 상도입니다. 우리는 군께서 세력이 있으면 군을 따르고, 세력을 잃으면 떠나는 무리에 불과합니다. 무엇을 원망하십니까?”

염파는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효성왕이 살아 있을 때까지 염파는 권세와 부귀를 누리며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조는 염파에 의해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효성왕의 뒤를 이은 도양왕(悼襄王)은 위(魏)의 번양(繁陽)을 공격하던 염파를 해임하고 악승(樂勝)으로 교체했다. 화가 난 염파는 악승을 격파하고 위로 망명했다. 염파가 없는 동안 조에서는 이목(李牧)이 등장하여 그의 결원을 보충했다. 염파의 내리막길이 다시 시작되었다.

위는 염파를 신임하지 않았다. 진이 조를 자주 침공하자, 도양왕은 염파를 다시 등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에서의 망명생활이 여의치 않았던 염파도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조왕은 사신을 대량으로 파견하여 염파의 근황을 살피게 했다. 염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곽개(郭開)는 조왕의 사신을 미리 만나 뇌물을 주고 방해공작을 펼쳤다. 사신을 만난 염파는 자신의 건재함을 자랑하기 위해 일부러 한 말의 밥과 10근의 고기를 먹었으며,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창을 휘둘렀다. 그러나 귀국한 조의 사신은 이렇게 보고했다.

“늙었다고 하지만 염파는 엄청나게 식사를 잘 했습니다. 그러나 신과 앉아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세 번이나 오줌을 누었습니다.”

도양왕은 염파가 늙었다고 판단하여 부르지 않았다. 염파가 위의 수도 대량에서 하릴없이 지낸다는 소식을 들은 초에서 몰래 그를 초청했다. 한 때 초의 장수가 되었으나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한 염파는 항상 조국 조의 군대를 그리워하다가 수춘(壽春)에서 죽었다. 곽개는 훗날 진의 사주를 받아 이목(李牧)마저 모함하여 죽였다. 인상여(藺相如), 염파, 이목은 조가 망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광채를 낸 영웅들이었다. 그들이 사라진 후 조도 진에게 망하고 말았다.

진은 반간계를 이용하여 염파를 해임시키고 조괄을 끌어내어 장평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조도 소대를 파견하여 진의 실력자 범수와 백기 사이를 이간했다. 거기에 걸린 백기는 결국 해임되었다가 자결해야 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의 죄업이 많았다는 것을 시인했다. 45만명을 죽이거나 생매장하고도 천명을 다한다면 천도(天道)가 있다는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역사상 이러한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백만의 적군 앞에서도 당당하던 무장이 하찮은 유언비어 한 마디에 목숨을 잃은 사례가 얼마나 많았는가? 장평대전 이후에 염파는 초로 망명했다가 객사했으며, 백기는 진왕이 준 칼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그들에게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정치가의 앞잡이가 되어 수많은 남의 아들들을 죽인 자의 말로라고 생각하면 공평한 일이다. 전쟁터였던 장평(長平)은 긴 안목으로 보면 공평하다는 뜻이었던가?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baramo989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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