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 2021.11.30 화 13:47
HOME 오피니언 칼럼
대전십무(大田十舞), 그 애매성에 대한 찬사서상욱의 한시 산책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 승인 2021.06.24 14:24

[여성소비자신문] 횡간성령측성봉(橫看成嶺側成峰), 원근고저각부동(遠近高低各不同).
 불식여산진면목(不識廬山眞面目), 지연신재차산중(只緣身在此山中).
 비스듬히 보면 산자락, 옆에서 보면 산봉우리,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이 같지 않다네.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내가 이 산 속에 있기 때문이라네.

소동파(蘇東坡)의 제서림벽(題西林壁)이다. 선시(禪詩)라고 해도 좋을 이 시에서 소동파는 관점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는 대상에 대한 철학적 명제를 제시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정관념에 매여 사물을 판단한다.

진실에 이르는 길목에는 의(意), 필(必), 고(固), 아(我)라는 장애물이 있다. 그것을 넘어서야 진정한 무(無)에 이른다. 무는 가치판단에 대한 유보이다. 유보된 상태라야 자유롭게 진면목에 접근할 수 있다.

Edmund Husserl은 현상이 실존의 체험적 세계를 떠나서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다. 개인적 체험이 과연 총체적 인식과 일치할까? Maurice Merleau Ponty는 우리의 모든 인식에는 애매성(Ambiguity)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애매성은 명백성(Crarity)의 반대로 거리가 먼 둘 이상의 지시내용 또는 서로 다른 감성과 태도를 가리킨다.

과학이 애매성을 극복한다면, 예술은 애매성의 진면목을 미적으로 드러낸다. Jacques Derrida는 차연(差延)이라는 개념으로 불안정하고 변덕스러운 의미구조와 언어의 연쇄작용을 지적했으며, Gilles Deleuze는 차이 자체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긍정했다.

노자도 말했다. 천하개지미지위미(天下皆知美之爲美)는 사오이(斯惡已)요, 개지선지위선(皆知善之爲善)은 사불선이(斯不善已)이다. 천하가 모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이미 꺼림의 대상일 뿐이고, 모두가 옳다고 하는 것은 이미 옳지 않은 것으로 변한다. 모두가 상호모방의 포로가 되어 도그마를 맹신할 때, 예술가는 모든 결함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천진무구하고 고상한 존재가 된다.

오로지 자기 내부에서 치밀어 오르는 충동에 몸을 맡기는 것은 독립불구(獨立不懼), 둔세무민(遯世無憫)의 경지에서나 가능하다. 니체의 위버맨쉬(Overman)는 모두가 가리키는 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는다.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이 보기 싫어하는 것까지 직시한다고 자신한 카이사르의 말처럼 철학자와 예술가는 고통을 안고 누구도 하지 못하는 선언을 한다.

그들에게 자기세계에 대한 표현은 전쟁보다 치열하고 위험하다. 고통이 심할수록 극한에 대한 통찰이 가능하다. 그리스인이 희극보다 비극을 중시한 것은 그 때문이다. 

경험과 지성이 인정하지 않는 이상한 논리라도 정의라는 이름으로 신성화되는 순간 함부로 비판할 수 없는 도그마로 변한다. 대중은 현실의 도그마에 굴복한 나머지 자기 내면의 불합리한 규칙을 바꾸거나 지금과 다른 세상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거부하는 척 흉내만 내거나, 위험하지 않거나, 전망도 없는 거부에 연연한다.

수많은 외눈박이 군상들이 안전, 평화,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투쟁과 희망을 포기한다. 진정한 예술은 자명한 사실을 전복시키기 위해 자기의 이익을 초월한다. 거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두 개의 눈을 지닌 이방인(Alien) 또는 경계인(Marginal Man)이다. 어쩌면 그날 그곳에는 세 사람의 이방인이 피동적인 입장을 한사코 뿌리치고, 애써 자기 아이덴티티를 보이려고 했을 것이다.

Albert Camus가 이방인에서 부정(不定)을, 페스트에서 긍정을, 산문집 안과 겉에서 긍정과 부정의 사이를 사랑으로 메운 것처럼, 이방인이 토박이(Native)와 동화하는 것은 양극단이 좁혀지는 치열한 충돌과 융합의 과정이다. 예술가는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한 사람은 현대예술은 사기라고 선언한 예술 철학자이자 작가인 홍가이, 한 사람은 약 300년 전에 자기 진영을 향해 총을 쏘다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계룡산 뒤쪽 논산 노성(魯城)에서 생을 마감한 명재(明齋) 윤증(尹拯), 다른 한 사람은 대전시립연정국악원 큰 마당에 ‘대전십무’를 올린 충남대학교 정은혜(鄭殷惠)이다.

나는 이들 이방인들을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는 방관자(Bystander)였다. 역사적으로 이방인에 대해 가장 집요하게 대립한 사람들은 비유태인을 Gentiledom으로 규정한 구약성서와 사방의 비중화권을 사이(四夷) 즉 오랑캐로 규정한 주자학이다.

그 대척점에는 라틴어 Vernaculum에서 유래된 Vernacura가 있다. 우리말로는 토박이에 해당한다. 이방인은 토박이가 타자를 부르는 배타적 호칭으로 변했다. 로마인들에게 베르나쿨룸은 교환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니라, 자급자족하는 것들의 총칭이다.

호혜를 바탕으로 관용과 포용을 중시했던 로마인들에게 베르나쿨룸은 교환의 조건일 뿐이지 배타적 개념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젠타일돔이 주류를 이루면서 비기독교인을 이교도로 배척하자, 서구에서 호혜문화는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은 집요하게 문명의 중심부로 파고들었다. 인류의 문명은 그들의 도전에 대한 응전과 적응을 통해 발전했다.

임진전쟁 이후 조선은 종주국 명(明)과 문화적, 역사적 동질성을 토대로 나라를 되찾아 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외교적 레토릭을 설정하고, 침략자였던 일본과 잠재적 침략자인 여진을 적대적 타자로 규정했다.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국가적 아이덴티티의 위협으로 여긴 서인은 인조반정을 통해 대북정권을 무너뜨리고 이후 약 400여년의 노론정권 서작을 연다. 서인이 노론으로 정예화되는 과정에서 소론과의 분화가 이루어진다.

소론의 영수가 윤증이다. 논산 노성에는 윤증고택이 있다. 이 고장을 노성(魯城)이라 부르는 것은 공자의 나라 노(魯)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당인 궐리사(闕里祠)는 오산, 진주, 논산에 남아 있다.

멀리 계룡산의 비범한 자태가 보이는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터전에 300년 이상 오롯이 남은 이 명가는 인문문화의 정수이자, 전통윤리와 미학의 교범이다. 지식이 지성으로 승화되려면, 실행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최고의 미학으로 빛을 드러내려면 자기 진영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는 용기와 양심이 필요하다.

거기에 동양전통미학이 개입되면, 역경 지산겸괘(地山謙卦)가 강조하는 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 겸허와 절제가 중시된다. 할 수 없는 자의 양보는 무능과 굴욕이지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보하는 겸양은 공존을 위한 대의이다.

윤증은 율곡 이이, 송강 정철, 구봉 송익필과 친구였던 우계 성혼의 외증손으로 서인의 이념적 지도자 사계 김장생의 아들 김집과 함께 훗날 노론의 영수가 된 우암 송시열로부터 주자학을 배웠다.

인맥과 학맥으로 보면 그는 서인의 주류였다. 그러나 주자학과 성리학의 편협성에 반발하고, 양심(養心)을 중시한 양명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정치적으로 야당인 남인에 대한 포용과 송시열의 지나친 세력에 비판을 가하면서 집권당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의 지성이라는 거울에 비친 위험성은 노론의 도그마에 꽂혔을 것이다. 소론의 저항은 찻잔 속의 태풍처럼 소멸되었지만, 윤증고택의 훈기는 노론의 장기집권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윤증은 아직도 우리의 주류사회에서 이방인처럼 어색하다. 심지어 고향에서 조차 그는 이색적인 존재이자 거북한 진실이다. 고택은 윤증의 유훈을 지키며 작은 건물 하나도 늘어나지 않았다. 훈기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다. 모두 수용하지 못하게 되자, 마을에 민박시설을 갖추게 했다. 동네가 함께 손님을 맞이한다.

윤증은 스승을 등진 배덕자라는 강한 역공을 받았지만, 지성과 대의라는 두 개의 깃발을 내리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을 이어온 후손들은 절제와 공존을 통해 동학과 한국전쟁에서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송시열의 회덕(懷德)과 윤증의 노성 사이에 대전이 있다. 윤증은 조선이 망한 후 비약적으로 성장한 이 도시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들이 사활을 건 논쟁을 펼칠 때, 대전은 중심노선에서 빗겨선 변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변방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홍씨는 남양을 본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홍가이는 풍산이 본관으로 사도세자의 세자비이자 정조의 어머니였던 혜경궁과 소설 임꺽정을 지은 월북작가 홍명희와 일족이다. 경기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미국으로 건너가 MIT에서 예술철학으로 박사가 된 그는 수학과 물리학에도 정통했다.

예순이 가까운 나이에 귀국한 이후 줄곧 동양적인 것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서구적 개념에 대한 열등감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영어보다 우리말에 서툰 그의 현실적 난관보다 어지간한 지성인들마저 그의 어그레시브한 학문적 호의를 감당하지 못하는 장면이 나는 더 당혹하다.

그는 상대에 대한 최고의 존경은 치밀한 분석과 예리한 비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호의를 즐겨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홍가이는 학문에 머물지 않았다. 회귀(Nostoi)를 비롯한 희곡창작에도 그의 놀라운 천재성이 발휘되었다.

고급 영어로 쓴 그의 작품은 영어보다 서툰 그의 한국어 실력 덕분에 수준 높은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이방인이자 손님이었다. 토박이들에게 그는 타자의 시각을 지닌 귀찮은 이방인이었고, 공격적인 비판자에 불과했다.

대전십무를 관람하기 전에 홍가이와 노성 윤증고택에서 만났다. 나는 파평윤씨라는 대종보다 굳이 노성윤씨라고 자부하는 후손들의 출발점인 윤증과 한사코 토종들의 속 좁은 관습에 물들지 않으려는 홍가이를 같은 공간에서 보고 싶었다. 홍가이는 윤증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방관자에게 시공을 초월한 이방인들의 오버랩은 대단한 호기심이었다. 윤증은 변함없는 절제와 묵직한 침묵으로 우리를 지켜보았다. 그것은 파멸이 오더라도 서둘러 나서지 않겠다는 심념의 기다림이었다.

절제와 침묵을 마주 대한 홍가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절제와 침묵의 가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의 성과 같은 ‘Hong’이라는 커피숍에서 나와 그는 절제와 침묵 이후에 대한 담론을 자연스럽게 이어갔다.

절제는 폭발의 사전운동이고, 침묵은 선언에 앞선 긴장이다. 홍가이는 모든 경계를 초월하는 신화를 각색하려고 했고, 나는 Virtual society와 Fantasy를 새로운 생존공간으로 생각했다. 우리의 담론은 미완의 세계였지만, 거기에는 토박이도 이방인도 방관자도 구분되지 않는 새로운 세계가 있었다.

경계가 사라진 담론에는 게임이 개재되었다. 모든 놀이는 게임이고, 그 마무리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 네델란드의 Johan Huizinga는 Homo Ludens에서 놀이는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 자체가 놀이라고 했다.

게임이라는 놀이는 타자와의 소통과 교감을 가능하게 한다. 예기(禮記) 악기(樂記)에서 예로 조성된 차별 질서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악을 제시한 것도 다름이 아니다. 악은 예로 갈라진 사람들을 통합하는 수단이다. 우리는 저녁에 정은혜가 올리는 악을 보러 가야한다. 정은혜도 게임을 할까? 정은혜는 전주에서 자라고, 서울에서 대학을 마친 후 충남대학교교수가 되어 대전에 정착했다. 대전의 토박이가 아니라 이방인인 셈이다.

도시로서 대전은 20세기 초에 일제에 의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일본의 침략, 한국전쟁,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대전은 가장 비약적으로 발전한 도시이다. 특히 대전의 성장은 철도의 부설과 밀접하다.

일본이 철도를 부설할 때, 대부분의 지역은 철도가 지나가거나 역이 생기는 것에 반대했다. 현대화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라 그것이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전쟁에 노출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1898년, 일본이 경부선철도 부설권을 따냈을 때, 대전은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본격화되자, 다급해진 일본은 1905년에 보수성과 지방성이 적은 지역으로 대전을 선택했다.

이전에 이 지역의 중심은 회덕이었다. 1910년, 합방을 완성한 일본은 군청을 대전으로 옮겼다. 회덕은 송시열의 고향으로 전통과 성리학적 질서가 팽배했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1932년, 일제는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겼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미군정청, 임시중앙청, 육군본부, 전방지휘사령부가 설치되기도 했다. 1970년에 회덕에서 갈라지는 경부와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되었고, 대전과 진주를 잇는 고속도로까지 개통되어 대전은 교통과 물류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1989년 직할시로 승격했고, 1995년에는 광역시로 개칭되었다. 1997년에는 대전정부청사가 설립되어 10개의 중앙행정기관이 이전되었다. 한국정부는 서울, 과천, 대전으로 3분되었다. 지금은 세종시와 함께 제2의 행정도시로 변했다.

무엇보다 대전은 1993년 엑스포를 시작으로 KAIST와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면서 과학도시로 자리를 잡았다. 이것이 대전의 간략한 역사이다. 정은혜가 대전십무를 왜 기획했으며, 그가 보여주려는 것이 무엇일까? 그는 대전에 동화된 무용가의 시각을 지녔을까? 아직도 낯선 이방인의 시각을 보여주려고 했을까?     

대전십무가 창작춤으로 대전이라는 한 도시를 상징하는 컨텐츠로 완성된 최초의 춤이라는 평론가 최윤영의 말에 따라 공연의 컨셉과 전략적 목적을 이해해보려고 한다.

춤의 테크닉을 평가하는 것은 문외한인 나에게 무리이다. 제서림벽에서 여산의 진면목을 볼 수 없었던 소동파처럼 무용수의 몸짓과 무대장치와 같은 것을 보다가는 대전십무의 진면목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자체를 멀리서 흐릿한 눈으로 애매하게 바라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쩌면 공연을 기획한 정은혜의 진면목이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공연(公演)과 예술을 억지로 구분한다. 공연은 음악, 무용, 연극 등을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Performance 또는 Show를 가리킨다. 공연의 포인트는 공(公)으로 사(私)와 대비되는 말이다. 그에 비해 예술은 관람자를 의식하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표현하는 미적 활동으로 규정한다.

말하자면 사연(私演)이다. 그렇다고 공연에 예술성이 없고, 예술에 타자와의 교감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연출 이후에 관객의 권한이다. 본향에서 한밭북춤으로 이어지는 10가지 무용을 ‘대전십무’라는 타이틀로 묶으면서 정은혜가 의도한 것은 무엇일까?

공연이 끝나고 몇 분에게 물었다. 대전이라고 하면 무엇이 연상되는가? 첫째는 ‘대전 부루스’라는 대중가요, 둘째는 행정도시, 셋째는 과학도시라는 대답이 차례대로 많았다. ‘대전십무’는 결국 대전의 정체성을 춤으로 잘 드러내겠다는 의도에서 기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0가지 춤 어디에서도 가장 대전답다는 이상의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정은혜는 로칼에서 센터에 뒤지지 않는 춤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절반만 듣고, 절반은 듣지 않았다.

몇 년 전 중국 남방의 절강대학을 방문한 적이 있다. 절강대학에는 이상한 침묵과 절제가 있었다. 고조된 감정, 추상적 정치 관념의 강압, 합리성의 횡포, 대중민주주의의 선동, 근거가 약한 교만이 보이지 않았다.

중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이러한 감각은 중앙의 시각에 끌려가지 않겠다는 남방의 학문적 자존심이었다. 조용히 숨을 고르는 절강대학의 지성미에 감탄했다. 로칼은 글로벌이나 센터의 이해관계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절강대학은 항주가 자랑하는 장예모의 인상서호를 애써 외면한다. 장예모가 영화 영웅에서 거대한 통일체의 형성이 안전을 담보한다고 생각한 것에 대한 반발이다. 그들은 소규모 집단체제가 공생과 다양성을 유지한다는 춘추좌전의 철학을 중시한다. 로칼은 센터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러므로 센터가 구축한 가치관이 로칼의 가치를 유린하는 것을 거부한다. 나는 대전에서 절강대학의 침묵과 절제를 느낀다.

한마디로 대전은 경제적 필요성과 지정학적 위치 덕분에 현대화 과정에서 급성장한 도시이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는 하삼도라고 불렀다. 대전은 그 꼭짓점에 있다. 영남과 호남에 비해 강한 개성도 없다. 정치적으로도 늘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해왔다. 인구가 적기 때문만도 아니다. 말과 행동이 느리고, 분명하게 의사표현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행태는 역사적 배경과 지리적 위치에서 기인되었을 것이다. 대전의 이방인 정은혜가 이러한 점을 몰랐을 까닭은 없다. 최근 우리는 강력한 사회적 양분화를 목도했다. 어느 한 쪽을 지지하지 않으면 고립된다는 위기의식 때문도 아니다. 타자를 이해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이 기현상은 증오심 때문이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마음은 병리적 현상이다. 건강한 사회는 중간지대가 두텁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사라졌다.

이러한 시대적 질병을 치료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누가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할까? 정은혜는 이러한 딜레마를 패러독스로 대답한 것이 아닐까?

'대전십무’에는 정작 대전을 강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이 강력하고 분명한 이미지에 주력했다면, Craude Monet는 연작 ‘수련’을 통해 시선의 애매함을 보여준다. 사진에 대처하는 화가들의 선택은 실물과 다른 개인적 이미지를 그림에 담으면서 활로를 찾았다. 분명할 필요도 없고, 어느 쪽으로 기울 필요도 없다.

대전십무는 대전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주지 않았다. 대전은 아이덴티티가 불필요한 도시다. 대전은 캐스팅 보트의 경험을 토대로 센터보다 강한 포용력을 잠재능력으로 지녔다. 이 포용력을 바탕으로 두터운 중간지대가 형성되기를 원한다.

이것이 정은혜의 패러독스였다면 지나친 해석인가? 엘리자베스 라브루스의 말이다. 작품은 그에 담긴 사상을 기계적으로 반복,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애매모호하게 시대착오적으로 잘못 해석되는 과정을 통해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정은혜는 스스로 자아낸 의미라는 거미줄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는 대전에 가장 위대한 찬사를 보냈다.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baramo9898@hanamil.net

<저작권자 © 여성소비자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