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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연인 기다리는 마음 노래한 대중가요 ‘개여울’왕성상의 그 노래 그 사연
왕성상 언론인/가수 | 승인 2021.04.26 11:52

[여성소비자신문] 개여울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 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이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 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 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김소월 시(詩)가 노랫말, 이희목 작곡…1972년 ‘화가 가수’ 정미조 데뷔곡 
기다림 의미 알려주는 곡, 서정적 맛 물씬, 생동하는 봄에 부르면 깊은 감흥

‘화가 여가수’ 정미조(72)가 20대에 취입한 대중가요 ‘개여울’은 들을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든다. 청아한 목소리에 잔잔히 흐르는 멜로디, 아름다운 노랫말이 차분함을 더해준다. 겨울잠을 깨고 생동하는 봄에 부르면 깊은 감흥이 인다.

‘개여울’은 김소월(1902년 9월~1934년 12월)의 시(詩)에 이희목 선생이 곡을 붙여 만들어진 가요다. 4분의 4박자, 슬로우풍의 이 노래는 서정적 맛이 물씬 난다. 1965년 가수 김정희(1945년 4월 26일 평안북도 운산태생)가 먼저 취입했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청초한 목소리의 김정희 노래에 소녀팬들 반응이 뜨거웠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이후 1972년 정미조가 부르면서 유명한 곡이 됐다. 그의 나이 23살 때로 가수데뷔곡이다. 훗날 정미조 삶의 여정을 대변하는 곡이 됐다.

송창식, 최양숙, 심수봉 등도 불러

그 뒤 여러 가수들이 리메이크음반을 냈을 만큼 인기곡 대열에 올랐다. 여진, 송창식, 최양숙 등으로 이어진 ‘개여울’은 심수봉이 다시 부르면서 큰 인기를 모았다. 2006년 가수 적우(본명 박노희)가 리메이크해 취입, 10년 넘게 인기가 끊이지 않음을 또 한 번 증명했다.

이어 영화 ‘모던보이’(2008년)에서 배우 김혜수가, 같은 해 열린 제7회 대한민국영화대상 시상식 때 가수 김윤아가 부른바 있다.

지난해 신세대 여가수 아이유(본명 이지은)도 불렀다. ‘개여울’ 시(잡지 ‘개벽’에 발표)는 1922년 지어졌지만 이처럼 노래로 거듭나 대중 속에 파고 들었다. ‘개여울’은 ‘개천의 여울’을 말한다. 물이 흐르는 지형에 경사가 생겨 흐름이 빨라지는 곳이다.

노랫말로 쓰인 시 ‘개여울’은 우리에게 기다림의 의미를 알려주는 작품이다. 자신을 떠난 연인을 기다리며 삶의 동력을 얻는다. ‘있었겠지요’나 ‘부탁인지요’란 노랫말처럼 ‘돌아오겠다’는 그 약속이 확실치는 않더라도 꼭 올 것이라고 믿으면서다.

‘정한(情恨)의 시인’으로 불리는 김소월은 그곳에서의 정서를 그렇게 읊었다. ‘당신’과 말하는 이의 관계가 시의 한 축이다. 떠난 임에 대한 회고조 같으나 그렇잖다. 흐르는 것, 없어지는 것에 대한 소월의 시심(詩心)이 담겼다. 물은 섭리에 따라 ‘가는 것’들을 상징한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정서가 시의 얼개를 이룬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 심은’ 대목에서 지금에서의 없어짐이 그저 사라짐이 아니란 점을 말한다. 언뜻 보면 체념이지만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이려는 현실세계에서의 긍정이 여운으로 남는다.

정미조

시의 바탕이 그랬던 정미조는 개여울이 알려주는 기다림의 의미를 실천한 예술가다. 그는 7년 반의 가수생활을 접고 그림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났다.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그는 지적인 외모, 풍부한 성량으로 1970년대 가요계를 풍미했다. ‘개여울’,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 등을 히트시키며 가요계를 화려하게 펼쳤다. 7년간 13장의 음반을 냈다.

그러다 1979년 갑자기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화가 삶을 시작했다. 파리7대학교에서 박사학위(논문제목 ‘한국의 무신도 연구’)를 받은 뒤 1985년 귀국했다. 돌아와선 1년간 시간강사로 경희대, 한양대, 경남대 등지에서 강의하다 1993년 수원대 조형예술학부 서양화 교수로 임용돼 2015년 2월 정년퇴직했다. 가수로 되돌아온 그는 ‘37년’(2016년), ‘젊은 날의 영혼’(2017년), ‘바람 같은 날을 살다가’(2020년) 등의 노래를 발표했다.

김포출신 막내딸…그림에 노래 접목

그가 교수생활을 하면서 한동안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그러다 가수생활을 접은 지 22년만인 2001년 10월 KBS ‘예술극장’에 나가 예술과 삶을 얘기했다. 2005년엔 자신의 히트곡들을 음반(CD)으로 만들기도 했다.

교통방송에 나가 얘기하는데 유명한 가수였음에도 자신의 곡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갖고 있던 LP판에서 음원을 뽑아 CD로 만들어 가까운 사람에게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미술과 음악의 접목에 나섰다. 그림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삶을 노래로 나타내는 ‘종합예술행위’여서 반응은  좋았다.

이처럼 정미조의 삶은 특이하다. 1949년 5월 2일 경기도 김포의 부잣집에서 3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나 5~6살 때부터 음악적 끼를 보였다. 집에 있었던 일본제TV를 통해 AFKN(주한미군방송)을 보면서 미국 가수들이 노래 부르며 춤추는 것을 보고 따라했다.

그런 끼는 집안 내력에서 비롯됐다. 극장과 양조장사업을 한 그의 아버지는 트럼펫을 잘 불렀다. 어머니도 학창시절 메스게임을 지휘했을 만큼 활동적이고 춤에 일가견 있었다. 외가 쪽에도 화가, 조각가, 미술학원장 등이 있었다. 예능적 유전인자를 받은 정미조는 음악, 춤, 미술재능을 갖고 태어났다.

김포초등학교 3학년 때 무용에서 주연을 맡았다. 김포여중 땐 그림그리기대회에서 상을 받곤 했다. 배화여고 때부터는 그림그리기대회 단골수상자였다. 합창부 활동을 하면서 콩쿨대회에 나가 입상도 했다. 무용은 레슨을 받다 몸에 탈이 났고 음악은 성악지도를 받아도 재미가 없었다. 그는 외삼촌이 하는 입시학원(미술연구소)을 거쳐 이대 서양학과에 입학했다.

이화여대 미술대 다니며 ‘가수의 길’

그는 대학에 입학, 기숙사에 들어갔고 그곳 친구들과 친해지면서 노래를 불렀다. 신입생환영회 때 친구들 추천으로 무대에 나가 팝송을 불렀다. ‘이대 명물’이 된 그는 대학가 인기가수로 떴다. 축제 때마다 초대가수로 무대에 서기도 하고 학교 부활절 행사 땐 음대생들을 제치고 가스펠송(Gospel Song 복음성가)을 불렀다.

1970년 대학 2학년 땐 국군위문공연은 물론 이대생 20명으로 이뤄진 파월장병위문공연단으로 공군특별기를 타고 가 베트남 현지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음반제작제의가 쏟아지고 TV쇼 고정출연제의를 받았지만 할 수 없었다. 재학 중 외부활동을 금하는 이화여대 학칙 때문이었다.

대학재학 중 늘 장학생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4년간 학과대표를 맡은 그는 졸업한 뒤 노래를 부르는 조건으로 레코드사와 노래취입 및 가수활동계약을 했다. 1972년 3월 첫 음반이 나왔다. 그해 4월 후라이보이(곽규석)가 진행하는 동양방송(TBC)의 TV쇼(‘쇼쇼쇼’)에 출연, 팝송 ‘마이웨이’를 불렀다. 레코드사와 방송사 사람들 눈길이 쏠렸다.

그 때만 해도 대학 출신 가수가 드물었다. 고려대 법대를 다니면서 얼굴 없는 가수생활을 하다 졸업 후 본격 가요계생활을 한 김상희에 이어 두 번째였다. 대학재학 중엔 직업가수로 띄지 않다가 졸업 후 프로가수가 된 사람으론 국내 1호다.

이대 출신의 훤칠한 몸매, 잘 생긴 외모, 뛰어난 가창력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 바람에 데뷔 몇 개월 만에 전국 가수가 됐다. 피아트 자동차를 상품으로 내건 KBS 신인가요제 우승, 동아방송(DBS) 노래경연프로 10주 연속우승을 했다.

1978년 제9회 야마하국제가요제에 우리나라 대표로 ‘아 사랑아’를 불러 최우수가창상을 받았다. 그러고선 그는 “소리는 내고 싶은 만큼 냈다. 새 길을 가자”며 화가로 변신, 화제가 됐다. 그로부터 37년간 화가로서의 삶을 펼친 것이다.‘개여울’ 노래 작곡가 이희목 선생은 1931년 북한서 태어났다. 그는 1962년 KBS 창립 때 음악계장을 지냈다. 40여년에 걸쳐 베트남 주월한국군방송국 편성관, 기독교중앙방송국 음악부장, KBS TV 합창단장 등을 했다.

군가, 가요, 방송사로고송, 교가 등 많은 노래를 작곡했다. ‘주월한국군의 노래’, ‘개선행진곡’, ‘맹일병’, ‘맹호들은 간다’, ‘우리는 청룡이다’, ‘향토예비군가’ 등 9곡의 군가를 만든 군가작곡가로도 이름나 있다. 1979년 미국으로 이민 가 2002년부터 애틀랜타에 살고 있다.

 

 

왕성상 언론인/가수  wss4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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