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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태어난 대중가요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왕성상의 그 노래 그 사연] 패티김, 함께 지방공연 간 작곡가 박춘석 곡 받아 취입해 ‘인기’
왕성상 언론인/가수 | 승인 2020.11.27 15:04

[여성소비자신문]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 / 겨울은 아직 멀리 있는데

사랑할수록 깊어가는 슬픔에 / 눈물은 향기로운 꿈이었나

당신의 눈물이 생각날 때 / 기억에 남아 있는 꿈들이

눈을 감으면 수많은 별이 되어 / 어두운 밤하늘에 흘러가리

아 그대 곁에 잠들고 싶어라 / 날개를 접은 철새처럼

눈물로 쓰여진 그 편지는 / 눈물로 다시 지우렵니다

내 가슴에 봄은 멀리 있지만 / 내 사랑 꽃이 되고 싶어라

‘대중가요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은 가을 냄새가 나면서도 어디론가 훌쩍 떠난 연인을 떠올리게 한다. 박춘석(본명 박의병) 작사․작곡, 패티김(본명 김혜자) 노래로 1983년 여름 발표됐다. 37년이 지났지만 그리 오래된 느낌이 안 든다. 4분의 4박자 슬로우고고 리듬으로 잔잔히 흐르는 멜로디와 의미 있는 노랫말이 끌리게 만든다.

멀리 간 ‘옛 사랑’을 그리워하는 내용이어서 추모 연시(戀詩)를 읊조리는 것 같다. ‘겨울은 아직 멀리 있는데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이란 대목이 더욱 그렇다. 행간에 뭔가 아쉬워하는 분위기가 읽혀진다. 요즘 같은 늦가을에 부르면 계절감각에 딱 맞는 추억의 전통가요다.

‘박춘석 추모 특집방송’ 때 노래 에피소드 소개

이 노래는 1980년대 초 부산서 태어났다. 2010년 3월 19일 방송된 SBS-TV의 작곡가 박춘석 추모방송 때 그 사연이 알려졌다. ‘박춘석 추모특집-패티김, 이미자의 못다 한 이야기’ 프로그램에서다. 가수 이미자와 같이 출연했던 패티김이 고인을 떠올리며 들려준 에피소드 내용을 요약하면 짐작할 수 있다.

패티김은 1980년대 초 박춘석 선생과 지방공연을 자주 다녔다. 어느 날 밤 그녀는 부산에서 일(공연)을 끝내고 호텔방에 쉬고 있었다. 그때 “밑으로 좀 내려오라”는 박 선생의 연락이 왔다. 그녀는 곧바로 갔다.

박 선생은 “너무 좋은 곡이 떠올랐다”며 그 자리에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그가 노랫말을 만들고 곡을 붙인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이었다. 패티김은 피아노 전주를 듣고 확 끌렸다. ‘히트 예감’을 한 그녀는 멜로디 흐름이 너무 좋아 몸에 소름이 돋았다.

두 사람은 거기서 몇 번 노래연습을 했다. 며칠 후 패티김은 지방공연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가 녹음에 들어갔다. 어떤 곡은 수십 번을 연습해도 잘 안 됐는데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은 두 번 연습하고 세 번째에 취입을 마쳤다. 패티김은 추모특집방송에서 “크게 히트된 노래들은 전주곡에서부터 사람을 사로잡는다”며 부산에서의 피아노연주 추억담과 음반이 나오기까지의 뒷얘기를 들려줬다.

그렇게 해서 불후의 명곡은 발표됐고 훗날 패티김의 대히트곡으로 폭발적 인기를 모았다. 음반으로 나오고 무대공연과 방송전파를 타면서 빅히트한 것이다. 패티김의 대표곡이랄 만큼 팬들 사랑을 듬뿍 받은 작품으로 떴다. 박춘석 씨도 생전에 이 노래를 ‘가시나무 새’와 함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꼽았다.

이 노래의 제목이 시중에 나와 있는 대중음악책, 노래방 등에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으로 잘못 표기됐다는 지적이 많다. ‘사랑’이 아니라 ‘사람’이 맞다. 노래를 만든 박춘석 작곡가는 1930년 5월 8일 서울서 태어났다. 경기중학교를 나와 서울대 음대 기악과에 입학했지만 1년 다니다 그만두고 신흥대학(현 경희대) 영문과로 편입, 졸업했다.

그는 ‘트로트의 전설’로 한평생 혼자 살았다. 음악과 결혼했다며 창작활동에 빠져 약 2700곡을 발표했다. 어릴 때 고무공장을 경영하는 아버지 덕에 피아노, 오르간을 접한 게 음악 삶의 계기가 됐다. 중·고교시절 피아노와 아코디언을 스스로 터득했을 정도로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경기중 4학년(고교 1년) 때 베니김과 길옥윤의 제의로 서울 명동의 나이트클럽 ‘황금클럽’무대에 서면서 연주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1954년 데뷔곡 ‘황혼의 엘레지’(노래 백일희)로 작곡가 길에 들어섰다. 1955년 오아시스레코드에 전속된 뒤 ‘아리랑 목동’, ‘비 내리는 호남선’, ‘나폴리 맘보’, ‘아주까리 주막집’, ‘불국사 길손’ 등을 작곡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는 가수 이미자(79)와 만나면서 음악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1964년 지구레코드로 옮기면서 트로트작곡으로 돌아섰다.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흑산도 아가씨’, ‘황혼의 블루스’, ‘그리움은 가슴마다’, ‘한 번 준 마음인데’, ‘아네모네’, ‘떠나도 마음만은’, ‘삼백리 한려수도’, ‘노래는 나의 인생’ 등 600여곡을 만들었다.

이미자에게 ‘엘레지의 여왕’이란 왕관을 씌워준 주인공이기도 하다. 박춘석의 히트곡 중 4분의 1을 이미자가 불렀고, 이미자 히트곡 가운데 3분의 1은 그의 작품이다. ‘가슴 아프게’(남진), ‘초우’(패티김), ‘마포종점’(은방울자매), ‘별은 멀어도’(정훈희)도 그의 노래다.

히트곡이 쏟아지면서 1970년대엔 ‘박춘석 사단’이란 신조어까지 생겼다. ‘물레방아 도는데’의 나훈아(73), ‘연포아가씨’의 하춘화(65) 등도 박춘석 사단으로 분류됐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2700곡 이상을 작곡했고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도 개인최다인 1152곡이 등록돼있다.

제1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1994년), 옥관문화훈장(1995년) 등을 받았다. 2009년 박춘석기념사업회 추진위원회가 발족되기도 했다. 그는 1994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해오다 2010년 3월 14일 오전 서울 둔촌동 자택에서 80세 나이로 숨을 거뒀다.

1958년 ‘린다김’ 예명으로 미8군 무대서 가수데뷔

1938년 2월 서울태생인 패티김(82)은 1958년 8월 미8군 무대서 노래를 처음 시작, 반세기 넘게 음악 삶을 살아왔다. 그때 예명은 ‘린다김’. 그윽한 음색, 독보적인 카리스마, 세련된 무대매너로 인기였다. 그녀는 2013년 1월 1일 타계한 ‘미국의 전설적 여가수 패티 페이지’처럼 되고 싶다는 뜻에서 1959년 ‘패티김’으로 예명을 바꿨다.

그는 장르를 넘나드는 창법으로 국내·외 팬들 사랑을 받으며 숱한 기록을 남겼다. 1958년 처음 취입한 번안가요 ‘사랑의 맹세’(원곡제목은 Till) 이래 ‘한국가수 최초’ 기록만 해도 수두룩하다.

일본정부가 공식 초청한 최초 한국가수(1960년), 특정가수이름을 내건 리사이틀로는 국내 처음인 서울 피카디리극장 공연(1962년), 한국가수 최초로 미국서 연 뉴욕과 라스베이거스공연(1963년), 대중가수로선 처음인 서울 세종문화회관 리사이틀공연(1978년), 한국가수 최초 미국 카네기홀공연(1989년)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의 목소리는 장르한계를 뛰어넘는다. ‘대형가수’ 소리를 들은 건 우연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국악원에서 전통음악과 남도창을 배웠고 국악콩쿠르에서 서울시장상을 받았다. 홍난파의 ‘봉선화’ 노래를 녹음한 것으로 유명한 소프라노 김천애로부터 성악을 배우기도 했다.

패티김은 ‘1호 한류가수’다. 일본음악계 거물인 재일교포 와타나베 히로시 초청을 받아 그의 빅밴드 스타더스트 전속보컬가수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미국 프로모터 밥 맥머킨에게 뽑혀 라스베이거스 뮤지컬무대에도 섰다. NBC ‘투나잇쇼’에선 ‘Summer Time’을 불렀다. 시대를 앞선 그의 무대장악력은 1960년대 전반 외국무대에 선 경험들이 쌓인 것이다.

엄격한 자기관리 에피소드도 유명하다. 무대를 신성하게 여겨 공연 때마다 새 구두를 신었다. 특히 목소리에 직결된 감기와 몸매에 무척 신경 썼다. 목에 주름살이 생길까봐 잘 때 베개를 베지 않은 ‘시체 잠’을 잤을 만큼 빈틈이 없었다.

패티김, 2013년 10월 마지막 공연 갖고 공식은퇴

패티김은 2013년 10월 26일 오후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마지막 은퇴공연을 갖고 가요계를 떠났다. ‘굿바이 패티’란 제목의 무대에서 ‘서울의 찬가’, ‘서울의 모정’, ‘못 잊어’, ‘초우’, ‘가시나무새’ 등 자신의 히트곡들을 열창해 55년 가수인생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왕성상 언론인/가수  wss4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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