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 2020.10.22 목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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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에 빠진 삼국유사 구하기:역사학자의 공감적 성찰은 왜 필요한가?하도겸 칼럼 25
하도겸 나마스떼코리아 대표 | 승인 2020.09.08 16:08

[여성소비자신문]에드워드 핼릿 카(E.H.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학도로서 뿐만아니라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필독서 가운데 하나였다.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책 100권 중에 포함된 이 책은 “사회와 개인은 분리될 수 없으므로 역사는 하나의 사회적인 과정이며 개인은 그 과정에 사회적인 존재로서 참여한다”,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역사란 역사적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의 과정이다” 등의 중요한 개념을 전한다.

한국고대사의 보고인 삼국유사가 전하는 수많은 신화와 불교 영험담같은 설화에 담긴 은유와 상징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현재 난해한 삼국유사는 거의 사료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다. 그런 획일화된 역사해석이 한국사 교과서에 실리고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도 나오고 있으나 그것이 곧 우리 고대사를 제대로 구성한 것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우리네 인생도 그렇듯이 역사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학자라면 파벌 등의 구속으로 묶인 줄을 스스로 풀고 합의없이 어깨에 들려진 멍에를 가볍게 시원하게 벗어나서 삼국유사 등의 사료를 다시 봐야할 책무가 있다.

누구는 그런 무게감이 품격이라고 하지만 그건 대세론에 따르고자 하는 열등인자를 가진 우리 인간의 자학적 선언에 불과할 수 있다. 왜냐하면 획일적인 강요는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당시의 시선으로 과거 시대의 사람들과 공감하는 성찰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의 역동적인 흐름은 신이나 제왕 그리고 식민지의 어둠으로부터 벗어나 우리 인간이 오늘날의 민주주의 시민사회 혁명의 주역이 되게 했기 때문이다.

역사의 해석은 역사가들에게 다양한 시각과 입장이나 커다란 안목을 요구한다. 구태의연한 묵수(墨守)를 넘는 유연성과 창의성은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創造)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역사학과 자연스럽게 연계시켜줘야 한다. 이처럼 역사는 과거의 사람들과 공감하며 스스로가 그 사회에 일원으로 동화되어 갈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야 할 인문학의 한부분이기에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고대 사회의 설화 등은 신앙과 민속 등의 상부구조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현대인의 관점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사유 구조와 가치관 체계부터가 전혀 다른 이들과의 만남은 세대차를 넘은 시대차, 어쩌면 이문화 교류라고도 할 수 있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아무리 시대가 다르다 해도 결국 사람이 사는 방법은 비슷해서 아무리 많이 다르더라도 우리의 눈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못할 것도 없다.

따라서 일부 설화에 매몰되어 역사 자체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이해를 위한 상상력의 나래를 펴기 시작한다면, 그때부터 역사학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타임머신이 된다. 이렇게 상상력은 사료를 낯설어하는 우리에게 사료에 그려진 고대 사회에 대한 어쩌면 리듬감 있는 생동감을 준다.

물론 과거와 현재의 차이는 존재한다. 이런 차이야 말로 시대성이 다양하게 반영된 것으로 현실과 오버랩시킬 때 겹치지 않는 시대상의 다양성이기도 하다.  이런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어떤 열쇠를 가지고 지적 호기심과 궁금증을 풀어가야 하는것일까? 상상의 나래를 편다고 해도 그 추락하는 날개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합리적인 의심을 넘지 않기 위한 경계의 설정은 필요하다. 상상을 하더라도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라는 개연성으로 시작해서 “아 그거 맞네”하면서 무릎팍을 칠 수 있는 타당성까지의 범위에 머물러야 한다.

잠시 벗어나는 경우가 있더라도 바로 돌아올 수 있는 환원력이나 복원력이 없다면 그것은 역사과학이 아닌 문학의 영역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다리는 넘어간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속좁은 고정관념을 상징하는 우물물에 빠진 삼국유사를 건져내는 작업은 사료비판의 성공여부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된다. 우물안에서 벗어나 더 큰 세상을 보고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다면 그것은 공자가 꿈꾸던 21세기의 현인으로서 이상적인 역사가가 되는 일이 아닐까도 싶다.

우물 안에 갇혀 있는지도 무서워서 확인조차 못하는 개구리와는 달리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공공연히 확인할 수 있는 용기를 내야한다.

설화속의 은유와 상징은 암호와 코드로서 문학작품속의 모티브나 복선 등과 다르지 않다. 삼국유사는 우리 고대사회의 풍부한 신화와 설화를 전하는 사료적 가치가 큰 불교용 포교자료집이다.

그러나 상상력을 동원해서 암호와 코드만이라도 합리적인 사료비판을 순리대로 풀다보면, 세상의 인과관계와 인간관계가 만들어가는 인생군상을 통해서 삶에 대한 흥미와 교훈 그리고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하는 마법의 책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 쓴다는 춘추필법이 정석이라면 역사가는 왜 다른 이야기는 침묵하면서, 굳이 몇가지만 중요하다고 언급한 것일까? 취사선택 자체가 아무리 실록체라고 하더라도 공심(公心)을 가장한 사심(私心)이 작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전인수(我田引水)까지는 아닐지라도 뉴스 앵커의 게이트키핑(gatekeeping)과 비슷한 정치성과 당파성과 무관하지 않으므로 이에 대한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가짜뉴스라고 할 수는 없지만 굳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이유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 즉 사료비판이 요구된다. 나아가, 저평가된 인물이 있다면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지극히 평범한 어쩌면 원초적인 인간의 욕망의 표출 때문에 미화나 각광은커녕 사장된 인물들을 찾아내 당대의 주역으로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긴 자의 역사가 아니라, 나라가 편찬하고 통제한 사료가 아니라면 작가가 상상하고 싶은 역사라는 표현이 보다 정확한 평가가 아닐까 싶다. ‘왜 이렇게 썼을까?’라는 아주 사소하지만 흥미로운 의구심이 역사학 발전의 원동력은 아닐까?

이런 부담없는 사료와의 접촉 나아가 소통과 대화가 바로 과거의 사람들과 오늘을 사는 우리들을 연결하고 공동체적인 유대감을 강화시키는 매개고리가 된다. 그 역할을 해야 하는 우리 역사가들은 사료의 글쓴이가 되어 왜 그렇게 써야 했는지 아니면 쓰고 싶었는지에 대한 호기심을 품어야 한다.

그렇게 함께 호흡하며 공감하여 그들의 언행 속에서 그 생각을 읽고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모르고 넘어나거서 속을 것이 아니라 사실을 추적하고 알아내어 어쩌면 두근거리는 리듬감을 가지고 친숙하게 사료에 다가가야 한다. 그러기에 역사가의 상상은 무죄가 된다.

현실에 기반하면서도 당시 사회상을 이해하려는 시선에서 비롯된 무궁무진한 상상력은 만약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설득당해도 좋은 느낌을 준다면 그것은 이미 상상이 아닌 역사적 사실의 경계로 넘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삶에 가까워진 신화, 어쩌면 신화속의 현실, 그리고 그 현실과 접목한 상징과 은유의 세상에 빠른 스토리 전환을 설정하고 속도감 있는 읽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우리 역사가의 몫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역사란 과거에만 머무르는 어쩌면 오래된 미래를 품은 현재에서는 아무런 소용이나 의미가 없어져 버려진 폐부속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 고대사에 허무맹랑하고 터무니없는 신화란 없다. 전혀 이해가 안된다면, 작가의 머리 아니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 생각을 훔치는 “인셉션”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얼마전 삼국유사의 가이드북을 자처하는 “지금 봐야 할 우리 고대사 삼국유사전 신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2쇄를 낸 적이 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늘 그 의심을 거두지 않으며 화두처럼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원수를 찾은 것처럼, 하나하나 짚어가며 해결하는 과정을 차근차근 밟은 적이 있다. 늘 그렇듯이 역사는 미완의 혁명이며 오늘의 이야기도 또 하나의 전설로 잘하면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도 라닥지방의 누브라에 소재한 삼탕곰파에서 열린 축제에서 여신도들이 전통 춤사위를 보이고 있다

 

하도겸 나마스떼코리아 대표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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