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소비자신문] 수도원에서

정채봉

어떠한 기다림도 없이 한나절을

개울가에 앉아 있었네

개울물은 넘침도 모자람도 없이

쉼도 없이 앞다투지 않고

졸졸졸

길이 열리는 만큼씩 메우며 흘러가네

미움이란

내 바라는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네

이 시를 읽고 병원 약사로 일하는 내 친구는 힐링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럴 때가 있다. 괜스레 속에서 부아가 들끓는 힘든 일상을 어쩌다가 우리는 마주치게 된다. 옛말에 ‘화다수용火多水用’을 하라고 했다. 스트레스가 치밀 때는 물가(시냇가, 연못, 저수지, 강, 바다)를 찾아야 한다는 그런 얘기다.

조선시대 3대 정원(보길도 윤선도 세연정, 담양 양산보 소쇄원, 영양 정영방 서석지)을 부러 구경하는 것도 고급지고 낭만적인 방법이나 여행을 계획하지 않으면 아무 때나 닿을 수 없으니 개인은 큰맘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자. 물가는 지천이다. 내 집에서 그리 멀지 않다. 어는 곳에 살든 우리 주변에 물가는 있게 마련이다. 그곳은 가까워서 도보로 산책도 가능하다. 차로 이동해 30분 정도 달리면 3대 정원에는 미치지는 못하지만 자연 풍광이 좋은 곳을 찾을 수 있다.

그곳에 가서 어떠한 기다림도 없이 ‘나’는 한나절을 앉을 수 있다. 요사이 수원성 ‘방화수류정’을 즐겨 찾는다. 광교저수지, 광교호수공원, 일월저수지 등을 하릴없이 간다. 가서 물가를 호젓이 보노라면 쌓였던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스르르 녹는다. 기분이 금세 맑아진다. 회복이 된다. 맞다. 물가는 도서관을 짓기에 좋은 곳이기도 하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이 공부로 뜨거워진 머리를 짬짬이 물바라기로 식히기에 알맞다. 이 때문이다.

비 오는 날, 아름다운 정자 ‘방화수류정’에 홀로 앉아서 정채봉(1946~2001) 선생님의 시를 꺼내들고 찬찬히 읊조리다가 보면 “미움이란/내 바라는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이란 구절이 방언처럼 터진다. 처마 끝,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져 속기를 씻겨준다.

공자도 말했다. 논어에 그게 보인다. 자한子罕에 등장하는 말은 이렇다. “공자께서 개울가에 계시면서 말씀하셨다.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쉬지 않는구나(子在川上曰자재천상왈, 逝者如斯夫서자여사부, 不舍晝夜불사주야).”

앞에 시를 내가 처음 읽었을 때, 논어의 그 말이 떠올랐다. 시의 화자가 되어 따라가다 보면 행간 사이로 그게 들렸다. “나는 마흔 이전의 운은 타고날 확률이 높으나, 마흔 이후의 운이란 그 사람 자신의 ‘탓’일 확률이 크다고 생각한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일본의 ‘시오노 나나미(しおのななみ, 1937~ )’가 쓴《남자들에게》에 나온다. 명언이지 싶다. 급소를 찌르면서 훅 들어오는 말이다. 말하자면 ‘운’이란 것도 ‘나’하기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타인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마음인 ‘미움’이란 것도 ‘질투’라는 것도 알고 보면 “내 마음이 바라는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

마흔 이후엔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속이 필요가 없는 어떠한 기다림도 없이 한나절을/개울가에 앉아 있는 시간을 우리는 종종 가져야만 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찾아가야 한다. 그곳이 수도원이든 개울가이든 ‘물가’를 찾아서.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ylmfa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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